미치코 황후

美智子皇后

1934년 10월 20일 -

아키히토 덴노의 황후. 미혼 시절의 이름은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 1934년 10월 20일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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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얼마 전으로 추정되는 1959년 1월, 코후리소데(小振袖)[1]를 입고 집에서 포즈를 취한 미치코. 미치코의 친정아버지는 독일유학한 경험이 있어, 그 옛날에 집 또한 벽난로와 피아노 등을 들여놓고 서양식 저택으로 꾸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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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만 37세 생일을 며칠 앞둔 미치코 황태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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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된 미치코 황후.


1 결혼 전

친가인 쇼다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2]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백작 가문으로 화족이다. 아버지는 히데사부로(英三郞), 어머니는 후미코(富美子), 형제로는 오빠 이와오(巌),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恵美子), 남동생 오사무(修)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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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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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의 쇼다 미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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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친정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 집안이어서인지, 가톨릭계 학교인 후타바(雙葉) 여학원[3](유치원, 초등학교)[4]세이신(聖心) 여학원(중학교, 고등학교, 대학)[5]을 졸업했다. 미치코는 미모가 빼어났고, 공부, 음악, 미술, 운동 등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으며,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동경을 한몸에 받았다. 엄친딸 1957년 3월에는 세이신 여대 영문과수석으로 졸업하며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졸업 후 미치코는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었으나, 양친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쇼다 미치코는 장래가 기대되는 규수였다. 마치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오가사와라 사치코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2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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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던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가 은근 나이 들어 보인다.

세이신 여대를 졸업한 해, 미치코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아키히토 황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전통에 따르면 그동안 황실의 신붓감은 황족 내지는 화족. 특히 미래의 황후, 황태자비가 될 여성은 황족이나 화족 중에서도 오직 5개의 공작 가문(고셋케) 출신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쇼다 가문에서는 이미 미치코의 신랑감으로 어느 법조계 청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쇼다 가문은 황태자의 청혼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몇 달 동안 미치코를 미국유럽으로 여행보냈다. 1958년 10월 20일, 미치코는 미국 여행 도중에 만 24세의 생일을 맞았다. 그날 미치코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하며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이렇게 쇼다 가문도 미치코 본인도 괴로워했으나, 아키히토 황태자의 끈질긴 청혼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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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친정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후미코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미치코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다. 화족 가문 출신인 후미코는, '그들'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미치코는 몇 달 동안 황실의 일원이 되는 데 필요한 교육[7]을 받았다. 그리고 혼수. "결혼 비용을 여행하는데 다 써버렸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가더라도 저를 받아주실 수 있다면…"이라는 미치코의 말에 아키히토 황태자가 "OK"라고 한 것과 달리, 쇼다 가문은 억지로 딸을 시집보내면서 어마어마한 혼수까지 준비해야 했다. 무려 6t 트럭 3대 분량으로, 당시 금액으로 약 3,000만 엔이며 현재 시세로는 약 3억 엔. 재벌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기둥 뿌리를 뽑아도 모자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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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14일, 결혼을 앞두고 황실에 인사드리러 궁성을 방문한 미치코와 친정 부모. 소매가 땅에 닿을 듯 치렁치렁한 후리소데를 입은 미치코와, 짧은 소매의 토메소데를 입은 후미코가 대조된다. 미치코의 키는 161cm로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으나[8], 미치코보다 옛날 사람인 히데사부로와 후미코의 키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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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날 아침, 여동생 에미코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미치코. 에미코는 언니 미치코보다 더 키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미치코가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있긴 하지만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거인이었을 듯. 사진상으로 보면 에미코의 키가 173cm 내외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하게 큰 키다.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평민 출신의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다 하여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 크게 일었으며, 두 사람이 만난 계기가 된 테니스 또한 크게 유행했으며,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황실의 결혼식을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흑백 텔레비전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3 결혼 과정의 진실

세간에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이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치밀한 계획이 뒷이야기로 숨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덴노 일가는 인간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로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9]라는 규수가 거론되고 있었다. 하츠코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 어머니는 화족 출신인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 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이었다. 즉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구시대적인 규수였다. 새롭게 바뀌어야 할 황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규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파 인사들은 일류 여자대학교의 우등생들을 중심으로, 하츠코와 반대되는 유형의 규수들을 은밀하게 물색했다. 그 가운데 미치코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파 인사들은 유복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한 미치코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로 꼽았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연애결혼과, 황실 입성 후 미치코 황태자비가 보여 준 파격적인 면모들을 생각하면, 개혁파 인사들의 작전은 대성공한 셈이다.

4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일본 황실에서 특정한 출신에 따라 황태자비를 결정하는 일은 천 년이나 되는 전통이었다. 막부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헤이안 시대에 황실이 직접 통치를 하는 대신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나라를 통치했다. 황후는 후지와라 씨 출신의 여성이 독점하였다.

이후 황후의 자격은 후지와라 씨의 후손인 5개 가문(고셋케)이나 황족 출신 여성으로 굳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고셋케는 화족으로 편입되어 공작 가문이 되었다. 그래서 방계 황족의 신붓감은 같은 황족이나 화족이어도 조건을 충족했지만, 미래의 고귀한 황후인 황태자비는 천 년 동안 이어진 전통에 따라 고셋케나 황족 출신이어야 했다.[10] 그러나 앞서 서술된 이유 때문에 최초의 평민 황태자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평민 출신의 신붓감에 대한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하긴 자신들은 신적강하로 인해 수백년간 이어내려져 오던 높디높은 신분을 잃고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했는데, 반대로 자신들의 아래로 여기던 평민이 황족, 그것도 장래의 국모가 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11]

시아버지 쇼와 덴노"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감쌌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秩父宮勢津子) 비[12],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13]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14], 이츠코의 여동생이며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15] 등등, 옛 황족들과 화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황실로 시집을 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게코는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병으로 죽고 말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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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 시아버지 쇼와 덴노,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함께. 어서 와, 시월드는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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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컬러 버전도 존재한다. 1959년이니 화질은 기대하지 말자

5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나가코 태후는 너무나 귀한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인지[17], 아니면 딸들의 불행한 삶과 죽음에 대한 화풀이였는지[18], 정말 죽기 직전까지도 나가코 태후는 계속 미치코 황후를 인정하지 않고 괴롭혔다.

6 평민 출신 황태자비의 파격

미치코 황태자비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황실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천년 동안 전해져 온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가정적',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궁성 내의 산전(産殿) 대신에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또한 가족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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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동궁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국소아과 의사인 Benjamin Spock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公務)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19]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마코 공주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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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 공주와 함께. 사야코 공주가 1969년생이니 197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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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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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키히토 덴노와도 금슬이 좋다고 한다. 아들 나루히토 황태자도 그렇고, 예상보다 애처가들이 많다 사실 황실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온갖 푸대접을 받았음에도 남편을 내조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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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를 통해서 처음 만난 것 때문인지, 지금도 남편 아키히토 덴노와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고. 사진만 보면 근처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옆집 노부부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오산이다

7 자녀

이제 일본화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남 1녀 모두 일반인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화족들은 신적강하로 공식적으로 지위가 무효화되었기에, 현대 일본에 화족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1959년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옛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그 난리를 떨었으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항간에 차남과 장녀는 미치코 황후의 친자가 아니라, 숨겨둔 의 자녀라는 소문도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서자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황실전범상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황족이 아니다 2014년에 들어서, 세 자녀들에 대한 각종 논란이 심각할 정도로 많아졌다.

  • 장녀 구로다 사야코 : 1969년 4월 18일 출생. 2005년 11월 15일,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의 오랜 친구이자 도쿄도청 직원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했다. 결혼 후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다.

8 가해자가 된 피해자?

8.1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

무엇보다 아들을 낳지 못해서 사이가 좋지 않다. 황태자 부부는 결혼 후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반면, 먼저 결혼한 차남 부부에게서는 금방 두 가 태어나 황실과 국민들로부터 갖은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황태자 부부는 점점 가족들과의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해졌고, 결혼한 지 8년 만에야 어렵게 아기를 낳았지만 딸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장래에 여성 덴노로 즉위시키자는 논의도 활발했지만, 5년 후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망했어요

이 외에도, 오랜 기간 외국에서 성장하여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활달한 마사코 황태자비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녀는 왕실 외교, 국제교류, 해외 순방 등등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 활동하고 싶었으나[20], 시부모는 아들 출산에 전념할 것만을 강권하였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방문을 요청해도 궁내청에서는 나루히토 황태자만 보내거나, 차남 부부 내지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는 솔직하며 아첨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랫동서 키코 비에 비해 시부모 및 시가 식구들에게 사근사근하고 애교있게 굴지 못한다고 한다. 아키히토 덴노의 가쿠슈인 동창으로 절친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21]는 이에 대하여 "마사코 황태자비키코 비처럼 약삭빠르고 상냥하며 시부모에게 순종했다면, 가족 문제는 유혈사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8.2 작은며느리 키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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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며느리 키코 비와 함께.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시부모와 수월하게 지낸다고 한다. 남편 후미히토 친왕, 시누이 구로다 사야코와 같은 학교인 가쿠슈인을 다닌 덕분에 시집오기 전부터 황실 가족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고, 시집와서도 적응이 빨랐던 것이다. 미치코 황후는 그녀를 '키코 짱(ちゃん)'이라 부르며 귀여워했고, 마코 공주카코 공주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 부부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덴노 부부를 방문하면서 더욱 친밀해졌다. 게다가 결국에는 황실 역사상 40여 년 만의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러나 시어머니며느리의 사이가 마냥 화기애애할 수만은 없는지, 키코 비와 친정어머니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가 결혼 전 미치코 황후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꾸중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키코 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하지만 집안에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 시종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키코 비의 사진들을 보면, 젊은 시절까지는 해맑고 순수하던 미소[22]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이상하고 억지스러운 미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히사히토 친왕의 출산 역시, (차남 내외도 야망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일단은 덴노 부부가 강요한 거라고 한다. 2003년 6월,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황태자 부부가 둘째를 낳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바 있고, 같은 해 12월의 기자회견에서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황실의 번창을 생각한다면 차남 부부가 셋째를 낳기 바랍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제 빨리 셋째를 낳아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의견이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강요했음에도, 히사히토 친왕이 암묵적으로 황태손으로 여겨지긴 해도 공식적으로는 황태손의 지위에 있지는 않다보니[23], 외동딸만 있는 황태자 일가보다 세 자녀가 있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생활비가 더 적다. 그래서 키코 비가 그 스트레스를 시종들에게 푼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9 자녀 교육문제설

장녀이자 막내인 사야코 공주는 미치코 황후에게 의지가 되는 소중한 딸이었으나, 시집간 후에 평민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몰래 세금을 타 쓴다는 소문이 있다(2014년경부터). 그렇다 보니 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거나, 사야코 공주가 서녀라는 등 별별 소문이 돌고 있다.

또한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미치코 황후가 가운데서 중재를 못 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마음고생 하는 건 필수인 듯

사실 후미히토 친왕은 어렸을 때부터 장난끼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단순히 말썽꾸러기 수준이 아니라, 대학생 시절에 가와시마 키코를 비롯해 많은 여자들을 거느렸다거나[24], 결혼하기도 전에 키코 비를 여러 번 낙태시켰다거나, 결혼 후에는 해외 순방에서 태국 여자와 바람을 피웠는데 이미 사생아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난봉꾼으로 유명하다. 얌전한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엄격했던 것과 달리, 후미히토 친왕에게는 미치코 황후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아, 서자라는 소문이 있다.[25] 하지만 미치코 황후의 세 자녀들 중 후미히토 친왕이 미치코 황후를 제일 닮았다는 평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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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는 평판이 좋긴 하지만 황위 계승 문제를 비롯해서, 미치코 황후의 세 자녀 모두 각종 논란이 심각한데, 그게 다 미치코 황후의 잘못된 육아 방식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저 위에서 언급된 <나루 짱 헌법>이라는 책은, 당시에는 인기가 많았지만 나중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면서 지금은 잊힌 책이 된지 오래다.

정말 옛날 이야기 중 미치코 황후를 음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실 나루히토 친왕은 아키히토 황태자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다!!"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부부의 결혼이 1959년 4월의 일이고, 나루히토 친왕이 1960년 2월생, 즉 결혼하자마자 생긴 아이라서 이런 소문이 돈 듯하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루머 중 하나.

10 세 손녀들과의 관계

미치코 황후도 그렇고 덴노 부부는 맏손녀인 마코 공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크다고 한다.

둘째 손녀인 카코 공주키코 비가 임신했을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결혼한 지 1년만이었고, 그 때문에 키코 비는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高円宮久子) 비[26]로부터 "큰며느리가 임신하기도 전에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하다니, 황실 내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 라고 한 소리 들은 적이 있었다. 미치코 황후가 키코 비의 임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소문은 없지만, 카코 공주가 지금과 달리 어렸을 때는 굉장히 조용한 성격이었던 걸로 봐서는, 카코 공주의 탄생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을 듯.[27]

셋째 손녀인 아이코 공주 역시 사이가 어떻다든지 하는 말은 없지만,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인 마사코 황태자비와의 관계도 그렇고, 히사히토만을 편애하는 걸 봐서는 그다지 화목한 관계는 아닌 듯하다.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책에 의하면,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다시 임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11 특이 사항

  • 세이신 여대 재학 시절, 미시마 유키오와 선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유키오와 미치코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유키오는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인 스기야마 요코(衫山瑤子)와 결혼했다.
  • 미치코 황후가 황후가 된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지만, 황태자비 시절에는 지금의 며느리들(마사코 황태자비, 키코 비)처럼 이미지가 무척 안 좋았다. 상술했던 내용처럼 나루히토 친왕이 아키히토 일왕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미치코 황후가 시집오자마자 큰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죽은 것을 두고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는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의 며느리들처럼 아랫동서 히타치노미야 하나코(常陸宮華子)[28] 비와의 신경전도 꽤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은 걸 보면, 마사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되거나, 히사히토 친왕이 덴노가 되어 키코 비가 덴노의 어머니가 된다면 이들의 이미지도 바뀔지도 모른다.
  1.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 중에서 가장 소매가 짧은 것인데, 소매 길이가 85cm 정도이다.
  2. 창업주는 할아버지인 쇼다 데이이치로(正田貞一郞). 이후 경영은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거쳐 지금은 남동생 오사무가 맡고 있다. 라면회사 닛신식품(日淸食品)과는 별개 기업이다.
  3.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후타바 여학원을 다녔고,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도 후타바 여학원을 졸업했다.
  4. 초등학교 시절에는 전쟁 때문에 피난하느라 전학을 몇 번씩 다녔다.
  5. 세이신 여학원은 옛 구니노미야 저택 부지에 세워졌다. 즉 시어머니 고준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터에서, 며느리 미치코 황후가 학창시절을 보낸 것.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부 간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착각에 빠지지만…
  6. 사실 말이 '청혼'이지, 황실의 청혼을 감히 끝까지 거부할 수 없다. 미치코 황후의 아버지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이며 마사코 황태자비의 아버지는 고위 외교관이어서, 청혼을 계속 거부하기에도 참 난처한 입장이었다. 실제 황실의 청혼을 연이어 거절했을 때 미치코 황후의 친정 쇼다 가문에도,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 오와다 가문에도, 감히 황족의 청혼을 거절한다며 편지전화 등으로 우익들의 괴롭힘이 연달아 이어졌다. 억지로 시집온 후의 삶은(…). 단 키코 비는 시어머니ㆍ형님과 반대로, 자신이 원하여 황실로 시집왔다고 한다.
  7. 일본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이 받는 교육. 역대 황실 신붓감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 황태자비였다. 오랜 기간 외국, 그것도 다신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유일신교) 문화권에서 성장한 오와다 마사코신토 등 일본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 및 과목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받은 것보다 훨씬 단축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노처녀인 오와다 마사코를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8. 1950~60년대 초기 미스코리아의 키가 162cm 정도였다. 2010년대의 미스코리아의 키는 대략 175cm 정도 된다. 그때도 미스코리아에서는 키가 큰 여성을 선호했다. 1970년대 아시아 패션 모델들이 남성 180cm 전후, 여성 165cm 전후를 키가 커서 옷발이 잘 받는다고 했다.
  9.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하츠코와 동갑이며 나가코 황후의 막내딸인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10.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英昭皇后),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황후(昭憲皇后),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는 모두 고셋케 출신이었고,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황후는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가문 출신이었다.
  11. 사실 이렇듯 왕의 사랑을 받던 여성들이 출신 때문에 반감을 산 경우는, 굳이 일본이 아니라도 다른 왕조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희빈 장씨만 하더라도 양반가의 규수는 아니라도 역관 출신 거부의 딸이었는데, 이 당시 대재벌의 딸인데다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규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황족 혹은 화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은 미치코 황후의 출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후는 어머니 후미코가 화족 출신이라, 친가는 평민이지만 외가로부터 화족의 피도 이어받고 있었다. 다만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끝까지 지켜내었지만, 희빈 장씨숙종에게 버림받았다는 차이도 있다. 만약 미치코가 아키히토에게 버림 받았으면 사약을 드링킹하고 비참하게 죽었을 듯?
  12.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이며,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이기도 하다.
  13. 다이쇼 덴노의 3남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로, 외가는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
  14.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15. 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6.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17. 당시까지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유권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게다가 아키히토나가코 태후가 딸만 넷 낳다가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이전까지 나가코 황후는 딸만 낳는다고 비난을 당해 왔고, 심지어 후궁 제도의 부활까지도 심각하게 거론되곤 했다. 실제로 신하들이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정하여, 쇼와 덴노에게 그녀들의 사진까지 제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후궁 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고. 후에 두 아들 아키히토마사히토가 태어나, 간신히 후궁 제도의 부활 여론이 잠잠해졌다
  18. 쇼와 덴노나가코 태후의 자녀들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는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병에 걸리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19. 맏이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에서 딴 것.
  20. 나루히토 황태자의 끈질긴 청혼에도 황실로 시집오기를 망설였던 오와다 마사코에게, 황실 측에서는 "황실의 일원이 되어서도 해외순방이나 국제교류 등의 활동을 하며, 외교관 시절처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물론 시집온 후로는…
  21. '긴부라 사건(銀ブラ事件)'의 주인공. 가쿠슈인 고등과 3학년이던 1952년 초에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시종들 몰래 긴자로 놀러 나갔다가, 잠시지만 황태자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들킨 뒤에 동궁대부(東宮大夫)와 경찰에게 엄청나게 깨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하시모토 류타로 前 총리는 그의 사촌동생.
  22. 일명 '키코 짱 스마일'이라고도 한다.
  23. 황실재정 관련 법률인 <황실경제법>에 따르면, 4조에서 덴노와 황태자 일가가 속한 직궁가에는 '내정비', 6조에서는 기타 황족들에게 그보다 단계가 낮은 '황족비'를 따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황태자 일가보다 생활비를 적게 받도록 되어 있다. 히사히토는 덴노의 친손자이긴 해도 황태자의 아들이 아니라서, 원칙적으로는 방계 황족이다.
  24.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가쿠슈인 대학 시절 테니스,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며 교제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이 동아리이지 실제로는 후미히토 친왕의 하렘이었다고 한다. 후미히토 친왕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꼬붕(…)을 시켜 동아리에 데려오도록 했고, 그렇게 모인 여학생들 중 끝까지 후미히토 친왕의 곁에 남은 여학생이 가와시마 키코였다는 것.
  25. 근데 어느 국가 왕실을 막론하고, 차기 국왕이 될 후계자는 엄격히 키우고, 그외의 자녀는 비교적 자유롭게 키우는 편이긴 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 때 태종은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엄격한(?) 편이었으나, 당시 왕위계승권에서 멀어져 있던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세종대왕) 등의 다른 자녀들은 보다 자유롭게 키웠다고 한다.
  26.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부인. 노리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황태자와 친밀했으나, 2002년 갑자기 사망했다.
  27. 키코 비도 딸만 둘을 낳아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작은며느리라서, 큰며느리인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는 덜했지만.
  28. 평민 출신인 형님 미치코 황후와 달리, 옛 화족 가문 출신이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미워한 고준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다. 단 하나코 비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 쪽의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