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閔甲完, 1897년 양력 9월 16일(음력 8월 20일) ~ 1968년 양력 2월 19일 http://www.greatcorea.kr/imgdata/greatcorea_kr/201209/2012090305137128.jpg '''[[영친왕]] 이은의 약혼녀.''' [[명성황후]]의 일족인 여흥 민씨의 민영돈의 딸로 태어났다.[* 민갑완이 태어난 날은 음력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날로부터 2주기 되던 날이다. 그러나 이전판에는 [[영친왕]]도 같은 날 태어났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는 완벽히 잘못된 서술이다. 민갑완은 1897년 음력 8월 20일(양력 [[9월 16일]])생이고, [[영친왕]]은 1897년 음력 9월 25일(양력 [[10월 20일]])생이다. [[명성황후]]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시해당하였다.][* 두 사람이 한날 한시 태어났다는 기록의 출처는 다름 아닌 본 항목에서 후술된 민갑완의 회고록 <백년한(百年恨)>이다.] '갑완'이란 이름은 민갑완의 할머니가 [[환갑|진갑]]을 맞은 해에 태어난 [[손주]]라는 의미라고 한다. [[순종황제]]의 2번째[* 첫 부인인 여흥 민씨는 황태자비 시절 죽었고, 이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와도 인척 간이었다고 하며, 그녀가 [[영친왕]]의 약혼녀로 선택된 것에는 이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10세에 [[영친왕]]의 약혼자로 간택되어 날을 잡아 혼례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일본]]은 '유학'이란 구실을 붙여 영친왕을 볼모로 끌고 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영친왕]]은 [[일본]]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후 민갑완은 1917년까지 10년간 [[영친왕]]의 귀국과 혼례만을 기다리며 지냈으나, [[영친왕]]이 [[일본 황실]]의 황녀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여왕([[이방자]])과 [[정략결혼]]하게 되면서 '''파혼당했다.''' 3개월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는데, 이 때에 부친 민영돈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분에 대해 [[이방자]] 문서에서 부친 민영돈이 독살당했다고 쓰여있으므로 [[확인바람]].]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김규식]]의 후원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일본]] 영사가 학교에 찾아와 민갑완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압력을 행사하여, 교장은 결국 민갑완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녀는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면서 거절했다. 이후 독서와 [[뜨개질]]로 세월을 보냈고, 여러 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였지만, 가난에 시달리며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1963년 [[영친왕]]이 [[박정희]] 정부의 주선으로 귀국하였으나 뇌연화증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귀국하였고, 그나마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1968년 2월 19일, 후두암으로 71세의 생을 마감'''하고 [[부산]]의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다. 민갑완이 쓴 '''회고록 <백년한(百年恨)>'''에는 간택 당시 상황이 적혀 있어 [[영친왕]]의 간택 행사에 대한 사료 중 하나로 뽑히지만, 문제는 어렸을 적 일을 몇십년 뒤에야 회상한 것인데다, <백년한> 자체는 본인이 직접 쓴 게 아니다. 그녀의 수기를 몇년 후 친척이 다시 정리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기록과 비교해 봤을 때 '''오류가 많다'''고 한다. 게다가 거짓말을 한 부분도 있다고 한다. <백년한>에선 민갑완이 재간택에 뽑힌 3명의 규수들 중 1명이라 적혀 있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민갑완은 재간택 대상으로 뽑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민갑완이 갑자기 [[영친왕]]의 약혼녀가 된 것은, 당시 [[일본]]이 [[영친왕]]을 유학 보내려는 것 때문에 궁지에 몰린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가 아들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민 씨 집안에 약혼 예물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친왕]]의 약혼녀란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박해를 받았고, 민갑완 본인이 '영친왕의 약혼녀'란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재간택 대상자가 아닌데 결혼 상대가 된 비정상적인 경우였다는 걸 후대에 숨기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높은 듯. 혹은 민갑완은 수기에 사실대로 썼는데, 친척이 숨기려고 거짓으로 쓴 것일 수도 있을 듯하다. 여담으로, [[영친왕]]의 회고록엔 이름 대신 거의 '민 규수(閔閨秀)'라는 호칭으로 통용된다. 민갑완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