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항목 : [[대한민국/정당/목록]], [[민주당/연혁]]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 '''[[민주당/연혁|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 ||<width=30%><:> --[[신민당(1967년)]]-- ||<:> {{{+1 →}}} ||<width=30%><:> '''[[민주통일당]]''' || {{{+1 →}}} ||<width=30%><:> 해산/--[[신민당(1967년)]]-- || 民主統一黨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반 [[유진산]]계인 [[양일동]][* 골수 진산계였으나 1972년의 제2차 진산 사태 때 진산과 결별하였다.], [[김홍일]], [[장준하]] 등이 중심이 되어 ‘야당의 새로운 진로와 좌표정립’을 표방하고 [[10월 유신]] 선포 직후인 1973년 1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창당하였다. 약칭은 [[통일당]]이다. 창당 대회에서 [[양일동]]을 대표최고위원으로 하였다. 최고위원에 [[윤제술]], [[정현섭|정화암]], [[김선태]] 등을 선출하여 집단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당헌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수 양일동을 비롯한 당 간부들이 대거 낙선되고 [[김경인]], [[김녹영]]만이 당선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다만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한 [[박병배]] 후보가 선거 무효 소송에서 재검표 끝에 승소하여 뒤늦게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4년 신민당의 총재 유진산의 사망과 [[김영삼]]의 총재 취임을 계기로 신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76년 1월 통합제의에 대한 김영삼의 거부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977년 48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양일동, [[김현수(정치인)|김현수]], 김녹영 등 3명만이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록 패하였지만, 민주회복과 평화통일성취 등 2대 목표를 내걸고 1979년 5월 출범한 [[김영삼]] 체제의 신민당과 각종 민주회복투쟁대열에 동참하였다. 1979년 8월 [[YH 사건]]에서 여공들의 농성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하여 신민당과의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사태[*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전 신민당 당수 이철승계 소속 원외 지구당위원장 [[유기준(1924)|유기준]], [[조일환(1916)|조일환]], [[윤완중]] 등이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자격이 없는 대의원 [[조윤형]] 등이 2명 있었으므로 김영삼의 총재 선출은 무효다"라고 주장하여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때 김영삼을 물먹였던 유기준은 1987년 [[이민우 구상]] 파동으로 [[이철승]]이 몰락하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군(2014년 기준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3당 합당]]까지 따라갔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민정계]] 정영훈에게 밀려 공천 탈락되었다. 사실 유기준 말고도 1970년대 신민당에서 이철승계 정치인이었던 사람들 중 1987년 이민우 구상 파동 때 이철승 대신 김대중계나 김영삼계 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제법 된다.]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등으로 정국경색이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 양당통합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1980년 2월 부총재 [[정상구]] 등 30여 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고, 4월 양일동이 사망함에 따라 당의 운명이 좌초될 상황에 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17 내란]]이 일어났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0년 10월 27일 자동 해산 조치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정당]] 민주통일당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