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일당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신민당(1967년)민주통일당해산/신민당(1967년)

民主統一黨

신민당의 반 유진산계인 양일동[1], 김홍일, 장준하 등이 중심이 되어 ‘야당의 새로운 진로와 좌표정립’을 표방하고 10월 유신 선포 직후인 1973년 1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창당하였다. 약칭은 통일당이다.

창당 대회에서 양일동을 대표최고위원으로 하였다. 최고위원에 윤제술, 정화암, 김선태 등을 선출하여 집단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당헌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수 양일동을 비롯한 당 간부들이 대거 낙선되고 김경인, 김녹영만이 당선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다만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한 박병배 후보가 선거 무효 소송에서 재검표 끝에 승소하여 뒤늦게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4년 신민당의 총재 유진산의 사망과 김영삼의 총재 취임을 계기로 신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76년 1월 통합제의에 대한 김영삼의 거부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977년 48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양일동, 김현수, 김녹영 등 3명만이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록 패하였지만, 민주회복과 평화통일성취 등 2대 목표를 내걸고 1979년 5월 출범한 김영삼 체제의 신민당과 각종 민주회복투쟁대열에 동참하였다. 1979년 8월 YH 사건에서 여공들의 농성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하여 신민당과의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사태[2][3]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등으로 정국경색이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 양당통합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1980년 2월 부총재 정상구 등 30여 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고, 4월 양일동이 사망함에 따라 당의 운명이 좌초될 상황에 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17 내란이 일어났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0년 10월 27일 자동 해산 조치되었다.
  1. 골수 진산계였으나 1972년의 제2차 진산 사태 때 진산과 결별하였다.
  2.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전 신민당 당수 이철승계 소속 원외 지구당위원장 유기준, 조일환, 윤완중 등이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자격이 없는 대의원 조윤형 등이 2명 있었으므로 김영삼의 총재 선출은 무효다"라고 주장하여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3. 공교롭게도 이때 김영삼을 물먹였던 유기준은 1987년 이민우 구상 파동으로 이철승이 몰락하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군(2014년 기준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3당 합당까지 따라갔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계 정영훈에게 밀려 공천 탈락되었다. 사실 유기준 말고도 1970년대 신민당에서 이철승계 정치인이었던 사람들 중 1987년 이민우 구상 파동 때 이철승 대신 김대중계나 김영삼계 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제법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