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파일:attachment/yeonghyo.jpg|width=240]] http://kra.hk/new/_upload/board/upload/Chaomin/200612/79_06.jpg [목차] == 소개 == 朴泳孝 [[1861년]] ~ [[1939년]] [[9월 21일]]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한 사람.[* 1882년 미국과 조약을체결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가 다음해에 정식국기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정치가이자 [[갑신정변]]의 주역 그리고 개화파 인물. 조선의 마지막 [[부마]][* [[덕혜옹주]]의 전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조선이 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결혼했던 관계로 부마에 봉해지지 않았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였고 그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었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춘고 또는 현현거사이다. == 생애 == 1861년 [[수원시|수원]]에서 진사 출신의 가문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25대 왕 [[철종(조선)|철종]]과 후궁 숙의 범씨(淑儀范氏)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으나,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죽게 되면서 혼자 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조선)|조선]]이 [[궁녀]]를 하사해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영혜옹주의 생모가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설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여럿 두었고,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다.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이 당시 개화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침투 그리고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그 해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이때 [[태극기]]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박영효가 이때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했다.] 선진문명이 발달해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게 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연회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의 집안 역시 풍비박산이 나게 된다.아버지 박원양은 감옥에 갇혔다가 비참하게 아사했고[* 출처 : 백범일지] 둘째 형 박영호는 일본 공사관에 피신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박영교]]의 아들 박태서 등만이 유모의 손에 의해 구출되어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박영효, 박영교 형제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박영효의 문중인 반남 박씨에서는 그의 항렬에 해당하는 항렬자를 바꾸는데 '영(泳)'에서 '승(勝)'으로 바꾸었다.[* 이는 다른 갑신정변 주역 들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안동 김씨에서는 김옥균 항렬의 '균(均)'을 '규(圭)'로 바꾸었고 달성 서씨에서는 서광범, 서재필 때문에 2세대의 항렬자를 바꾸어야 했다(...) '광(光)' → '병(丙)', '재(載)' → '정(廷)'. 남양 홍씨 문중에서는 홍영식 항렬의 '식(植)'을 '표(杓)'로 바꾼다. 이들이 신원 된 뒤에도 이미 바꾼 항렬자를 다시 바꾸기는 뭐했던지(...) 현재는 바뀌기 전과 바뀐 후의 항렬자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 1차 망명 ==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수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하고는 사이가 나빠져서 "옥균이 쟤가 [[갑신정변]]에 뭐 한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고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 일본정부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나 도야마 미츠루 등이 지원을 해줬다.] 김옥균과는 달리,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적응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거였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온 다음 영어를 배워야 했다고 한다-- --일본식 영어발음-- --현지어학연수 떠먹여줘도 안함--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꽤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11524|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일단 나이 차이가...? 이 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 조선 귀국, 그리고 2차 망명 ==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분류되면서 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그것도 [[유길준]]의 밀고로 이루어진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당시에 둘이 엄청 싸웠기 때문에 모든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에 일본으로 2차망명을 가게 된다.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조종 혐의까지 받았다. 뭐 일본사람들에게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왕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아무튼 이 일로 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심지어 이후 조각된 [[독립협회]]의 [[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 대통령 추대설과는 달리 진짜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대했다(...) 물론 이때 박영효는 반역자로서 단단히 낙인찍힌 상태였고 이는 독립협회 자신의 몰락을 불러왔다.]이나 심지어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 했으나..... 그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순종황제]]가 즉위하게 되면서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먼친척뻘인 [[박제순]]이나 일본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여론을 조성해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귀국의 모습을 만들었다. == 유배, 경술국치 ==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황제]]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미수한 혐의[* 사실 별로 근거는 없고, 이완용과의 정권 다툼에서 밀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박영효가 고종의 양위를 기뻐하지 않았으니 역적이라고 불렀고, 박영효는 이완용이 역적이라고 했을 뿐 죄가 없다고 맞섰다. 이 때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딱히 이완용과 박영효 사이에 차별성은 찾기 어렵다.]로 [[제주도]]에 유배를 하였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서울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때도 다시 자신의 종특을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를 [[마산]]에서 맞이한다. == 일제강점기 행보 == [[1910년]] [[한일병합]]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은사금은 받아서 그간의 빚을 갚는 데에 쓴 듯하다. 엄청 받았다면서 멀쩡한 저택인 상춘원은 왜 또 [[손병희]]한테 팔았나-- --심지어 빚을 갚았는데 안 갚았다고 소송이 걸려서 2번 갚을 지경에 처한 일도...--[[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291826105&code=940301|#]] [[1918년]]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3월 대한 국민 의회의 부통령으로 부임하였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그 해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6년]]에 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22년에는 경희궁 내 전각인 황학정을 철거해 등과정 터로 옮기는 데 앞장섰다. [[1932년]] [[일본]] 귀족원으로부터 의원직을 맡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최초이나 의미는 없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 임기중에 노환으로 죽었다. 그의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그의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 트리비아 == *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애국단체 등에서 후반에 [[친일]] 행적 등을 문제삼았고 역사 고증에서도 [[친일]] 행위가 드러나면서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친일파]] 명단 중 이름이 올려지기도 하였고 친일반민족 행위자 704인 명단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박영효의 가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박영효의 [[친일]] 행각 등을 거론하며 [[친일파]] 가옥 철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 설민석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박영효는 친일파인가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는데 그 사람이 박영효의 고손녀였다고 한다(...) 학생이 상처 받을까봐 별말 없이 학습상담을 해줬다고. [[분류:개화파]] [[분류:조선의 반란자]] [[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수원시 출신 인물]] 박영효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