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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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朴泳孝
1861년 ~ 1939년 9월 21일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한 사람.[1]

조선의 정치가이자 갑신정변의 주역 그리고 개화파 인물. 조선의 마지막 부마[2].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였고 그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었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춘고 또는 현현거사이다.

2 생애

1861년 수원에서 진사 출신의 가문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25대 왕 철종과 후궁 숙의 범씨(淑儀范氏)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으나,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죽게 되면서 혼자 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 이를 딱하게 여긴 조선궁녀를 하사해 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3]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설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여럿 두었고,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다.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이 당시 개화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침투 그리고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그 해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4] 선진문명이 발달해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게 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연회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의 집안 역시 풍비박산이 나게 된다.아버지 박원양은 감옥에 갇혔다가 비참하게 아사했고[5] 둘째 형 박영호는 일본 공사관에 피신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박영교의 아들 박태서 등만이 유모의 손에 의해 구출되어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박영효, 박영교 형제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박영효의 문중인 반남 박씨에서는 그의 항렬에 해당하는 항렬자를 바꾸는데 '영(泳)'에서 '승(勝)'으로 바꾸었다.[6]

3 1차 망명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수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하고는 사이가 나빠져서 "옥균이 쟤가 갑신정변에 뭐 한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고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7] 김옥균과는 달리,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적응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거였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온 다음 영어를 배워야 했다고 한다 일본식 영어발음 현지어학연수 떠먹여줘도 안함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꽤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일단 나이 차이가...? 이 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4 조선 귀국, 그리고 2차 망명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분류되면서 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그것도 유길준의 밀고로 이루어진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당시에 둘이 엄청 싸웠기 때문에 모든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에 일본으로 2차망명을 가게 된다.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조종 혐의까지 받았다. 뭐 일본사람들에게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왕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아무튼 이 일로 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심지어 이후 조각된 독립협회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8]이나 심지어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 했으나.....

그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순종황제가 즉위하게 되면서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먼친척뻘인 박제순이나 일본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여론을 조성해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귀국의 모습을 만들었다.

5 유배, 경술국치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황제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미수한 혐의[9]제주도에 유배를 하였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서울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때도 다시 자신의 종특을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를 마산에서 맞이한다.

6 일제강점기 행보

1910년 한일병합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은사금은 받아서 그간의 빚을 갚는 데에 쓴 듯하다. 엄청 받았다면서 멀쩡한 저택인 상춘원은 왜 또 손병희한테 팔았나 심지어 빚을 갚았는데 안 갚았다고 소송이 걸려서 2번 갚을 지경에 처한 일도...# 1918년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3월 대한 국민 의회의 부통령으로 부임하였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그 해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6년에 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22년에는 경희궁 내 전각인 황학정을 철거해 등과정 터로 옮기는 데 앞장섰다.

1932년 일본 귀족원으로부터 의원직을 맡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최초이나 의미는 없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 임기중에 노환으로 죽었다. 그의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그의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7 트리비아

  •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애국단체 등에서 후반에 친일 행적 등을 문제삼았고 역사 고증에서도 친일 행위가 드러나면서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친일파 명단 중 이름이 올려지기도 하였고 친일반민족 행위자 704인 명단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박영효의 가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박영효의 친일 행각 등을 거론하며 친일파 가옥 철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 설민석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박영효는 친일파인가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는데 그 사람이 박영효의 고손녀였다고 한다(...) 학생이 상처 받을까봐 별말 없이 학습상담을 해줬다고.
  1. 1882년 미국과 조약을체결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가 다음해에 정식국기로 사용되었다.
  2. 덕혜옹주의 전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조선이 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결혼했던 관계로 부마에 봉해지지 않았다.
  3. 영혜옹주의 생모가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
  4. 이때 태극기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박영효가 이때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했다.
  5. 출처 : 백범일지
  6. 이는 다른 갑신정변 주역 들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안동 김씨에서는 김옥균 항렬의 '균(均)'을 '규(圭)'로 바꾸었고 달성 서씨에서는 서광범, 서재필 때문에 2세대의 항렬자를 바꾸어야 했다(...) '광(光)' → '병(丙)', '재(載)' → '정(廷)'. 남양 홍씨 문중에서는 홍영식 항렬의 '식(植)'을 '표(杓)'로 바꾼다. 이들이 신원 된 뒤에도 이미 바꾼 항렬자를 다시 바꾸기는 뭐했던지(...) 현재는 바뀌기 전과 바뀐 후의 항렬자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7. 일본정부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나 도야마 미츠루 등이 지원을 해줬다.
  8. 대통령 추대설과는 달리 진짜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대했다(...) 물론 이때 박영효는 반역자로서 단단히 낙인찍힌 상태였고 이는 독립협회 자신의 몰락을 불러왔다.
  9. 사실 별로 근거는 없고, 이완용과의 정권 다툼에서 밀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박영효가 고종의 양위를 기뻐하지 않았으니 역적이라고 불렀고, 박영효는 이완용이 역적이라고 했을 뿐 죄가 없다고 맞섰다. 이 때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딱히 이완용과 박영효 사이에 차별성은 찾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