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정치인/목록]]. [[경기고등학교/졸업생]] [include(틀:국내 정치인)] https://tv.pstatic.net/thm?size=80x100&quality=9&q=http://people.phinf.naver.net/20150424_77/14298066534062U69g_JPEG/yonhapnews_33611672.jpg?width=150 朴容益. 일본식 이름: 美村文雄(베이무라 후미오) 1905년 1월 8일 ~ 1977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5년 [[강원도]] [[강릉시|강릉군]] 사천면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후기 관료로 근무하였다. [[경상북도]] [[봉화군]]수, [[예천군]][[군수|수]], 경상북[[도청(행정)|도청]] 상공과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임업]]계에 종사하여 대한임업개발주식회사 [[사장]], 경상북도목재주식회사 [[사장]],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자유당]] 강원도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강원도 강릉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최헌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6년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강원도 [[명주]][[군(행정구역)|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3.15 부정선거]] 자금에 관여한 혐의로 입건되었으며, 1961년 초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혁명재판]]을 받고 거액의 불법 선거 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 사면받았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강원도 강릉시-명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최익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강릉시 출신 인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국내 정치인 (원본 보기) 박용익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