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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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容益. 일본식 이름: 美村文雄(베이무라 후미오)
1905년 1월 8일 ~ 1977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5년 강원도 강릉군 사천면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후기 관료로 근무하였다. 경상북도 봉화군수, 예천군, 경상북도청 상공과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임업계에 종사하여 대한임업개발주식회사 사장, 경상북도목재주식회사 사장,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자유당 강원도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강원도 강릉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최헌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6년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강원도 명주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 혁명3.15 부정선거 자금에 관여한 혐의로 입건되었으며, 1961년 초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혁명재판을 받고 거액의 불법 선거 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 사면받았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강원도 강릉시-명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익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