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문서 : [[을사오적]], [[을사조약]]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4/Park_Che-soon.JPG/225px-Park_Che-soon.JPG 朴齊純 ~~혐짤~~ [[1858년]] [[12월 7일]] ~ [[1916년]] [[6월 20일]]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4646CD>'''[[내각총리대신|{{{#white 대한제국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 ||<width=30%><:> 1대 [[이완용]] ||<:> {{{+1 ←}}} ||<width=30%><#4646CD><:>'''{{{#yellow 2대 박제순}}}''' || {{{+1 →}}} ||<width=30%><:> 3대 [[이완용]]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4646CD>'''[[내각총리대신|{{{#white 대한제국의 역대 의정부 총리대신}}}]]''' || ||<width=30%><:> 6대 [[조병식]] ||<:> {{{+1 ←}}} ||<width=30%><#4646CD><:>'''{{{#yellow 7대 박제순}}}''' || {{{+1 →}}} ||<width=30%><:> 8대 민영규 ||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친일파]]''', [[매국노]], 그리고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 을사조약 체결 때 외부대신, 경술국치 때는 내부대신을 지냈었다. 1858년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이며 1883년 병과 합격으로 입문하게 되었고 [[1899년]] [[조선]]과 [[청]]의 통상조약과 [[1901년]] [[조선]]과 [[벨기에]]의 통상조약에도 기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외교 문제에서 역할을 하던 관료였으나... '''결국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서는 외부대신이라는 명목하에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입장에 찬성하여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그 직후 조약에 반대하여 참정대신직을 상실한 [[한규설]]의 후임으로 참정대신이 되었고 정미조약 때인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냈다가 그 해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에 의해 부상을 입게 되면서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을 맡았다. [[191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기다가 [[1916년]] 6월 자연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만 57세([[향년]] 59세). 일설로는 을사조약 체결에 상당히 부정적이거나 반대하였던 입장으로도 알려졌다. 분명 처음에는 '''대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반대한 건 맞다. 게다가 [[이완용]]을 비롯한 나머지 오적, [[이하영]] 등과 함께 결국은 자신도 체결을 막지 않는 것으로 의사를 밝힘에 따라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간의 겁을 주자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으로 선회해서 결국 체결도장을 찍어버렸다. 외교문제의 중추인 외부대신이란걸 생각하면 [* 이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세는 알지만 내가 외부대신인데 어떻게 찬성하냐?"라는게 박제순의 요지. 을사조약의 일부 자구를 모양 좋게 바꾸는 작업에도 [[한규설]]과 함께 참여하지 않기는 했다. 반면 반대를 외친 민영기는 수정에 참여했고 작위도 받았다.] '''"마음대로 하라"라는 태도는 변명도 되지 못한다.''' 조약 체결 이후 다른 오적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애국자와 민중들로부터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목숨을 건졌으며 이를 계기로 출퇴근 때 [[일본군]]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역시 [[욕 먹으면 오래 산다|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는 과학이었다.~~ 을사오적들도 그랬지만 일부 [[친일파]] 관료들은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의사들과 민중들의 습격을 우려하여 통감부의 위임으로 [[일본군]] 호위병 2명을 동행시켰던 사례가 있었다. 다만 그의 손자인 박승유([[1924년]] ~ [[1990년]])는 할아버지의 이런 행적을 부끄러워하고 [[2차대전]] 중 [[일본군]]에서 탈영하고 [[광복군]]에 들어가 주로 초모 활동[* = 의병 모집]과 음악을 통한 심리전 등으로 활약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성악가로 활동했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친일파 일족이 잘된 사례로만 알려져 있다.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16/read?articleId=19301456&bbsId=G005&itemId=63&pageIndex=1|#]] [[분류:개화파]][[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한제국군/군인]][[분류: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박제순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