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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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純 혐짤
1858년 12월 7일 ~ 1916년 6월 20일

대한제국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1대 이완용2대 박제순3대 이완용
대한제국의 역대 의정부 총리대신
6대 조병식7대 박제순8대 민영규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친일파, 매국노, 그리고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 을사조약 체결 때 외부대신, 경술국치 때는 내부대신을 지냈었다.

1858년 경기도 용인 출신이며 1883년 병과 합격으로 입문하게 되었고 1899년 조선의 통상조약과 1901년 조선벨기에의 통상조약에도 기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외교 문제에서 역할을 하던 관료였으나...

결국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서는 외부대신이라는 명목하에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입장에 찬성하여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그 직후 조약에 반대하여 참정대신직을 상실한 한규설의 후임으로 참정대신이 되었고 정미조약 때인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냈다가 그 해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에 의해 부상을 입게 되면서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을 맡았다.

191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기다가 1916년 6월 자연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만 57세(향년 59세).

일설로는 을사조약 체결에 상당히 부정적이거나 반대하였던 입장으로도 알려졌다. 분명 처음에는 대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반대한 건 맞다. 게다가 이완용을 비롯한 나머지 오적, 이하영 등과 함께 결국은 자신도 체결을 막지 않는 것으로 의사를 밝힘에 따라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간의 겁을 주자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으로 선회해서 결국 체결도장을 찍어버렸다. 외교문제의 중추인 외부대신이란걸 생각하면 [1] "마음대로 하라"라는 태도는 변명도 되지 못한다.

조약 체결 이후 다른 오적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애국자와 민중들로부터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목숨을 건졌으며 이를 계기로 출퇴근 때 일본군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역시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는 과학이었다. 을사오적들도 그랬지만 일부 친일파 관료들은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의사들과 민중들의 습격을 우려하여 통감부의 위임으로 일본군 호위병 2명을 동행시켰던 사례가 있었다.

다만 그의 손자인 박승유(1924년 ~ 1990년)는 할아버지의 이런 행적을 부끄러워하고 2차대전일본군에서 탈영하고 광복군에 들어가 주로 초모 활동[2]과 음악을 통한 심리전 등으로 활약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성악가로 활동했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친일파 일족이 잘된 사례로만 알려져 있다. #
  1. 이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세는 알지만 내가 외부대신인데 어떻게 찬성하냐?"라는게 박제순의 요지. 을사조약의 일부 자구를 모양 좋게 바꾸는 작업에도 한규설과 함께 참여하지 않기는 했다. 반면 반대를 외친 민영기는 수정에 참여했고 작위도 받았다.
  2. = 의병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