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항목 : [[왕사]] 이 항목은 [[부여]]의 역대 [[왕]]들에 대한 정보입니다. [목차] == 개요 == 불행히도 부여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때문에 부여의 역대 왕들이 누구였으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의 [[삼국지]]의 동이전에는 부여의 위치나 지리, 풍속 등에 대하여 기록해놓았을 뿐이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을 비롯한 국내 사료에도 부여의 초기 건국사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부여의 역대 왕사를 정리함에 있어서는 큰 공백기가 생기고 만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는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그 후손인 대소왕 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으나 그 뒤의 기록은 부분부분 끊겨 있어 제대로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 역대 왕 == === 부여 === [[동명왕]](?~?): 부여의 시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국내의 기록에는 부여의 시조를 해모수라 하였으나, 중국 측의 기록인 <후한서>에는 동명을 부여의 시조로 기록하였다. 동명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과 동일인물로 여겨지기도 하며 해모수와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북부여 === [[해모수]](?~?):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부루왕]]이 재상 아란불의 말을 듣고 가섭원으로 천도하자 기원전 59년 음력 4월 8일에 그 옛 터에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주몽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으나 기록 상 모순이 보인다. === 동부여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 나라를 동부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뒷부분에 동일한 나라를 북부여라고 기록하는 등 혼란이 있다. 게다가 광개토왕비에서도 주몽이 도망쳐 나온 나라를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라고 기록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나라를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서기 285년 선비족이 침입해 의려왕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동쪽으로 피난을 갔을 때 옥저로 피난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동부여라고 보고 있다. 광개토왕비에 '동부여는 예전부터 우리(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주몽이 북옥저를 정벌한 적이 있기 때문. 하지만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른다. || 이름 || 재위기간 || 비고 || || [[해부루왕]] || ? ~ ? || 가섭원 천도, 동부여 건국 || || [[금와왕]] || ? ~ ? || || || [[대소왕]] || ? ~ 22 || 정확한 계보가 끊김(이후 왕위의 계보가 불확실)[* 주몽과 동년배인 걸 생각해 보면 죽을 때 '''80대 노인'''이었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긴 수명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설이 존재한다.] || === 중국 사서에 나오는 부여 === || 이름 || 재위기간 || 비고 || || ? || 1세기 || [* 서기 49년에 한나라에 조공을 바친 기록이 있다.] || || [[시왕]] || 1~2세기 || [*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夫余王始'라는 구절이 '부여의 왕 시'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부여의 왕이 비로소(처음으로)'라고 해석될 수도 있기에 논란이 있다.] || || [[위구태왕#s-1|위구태왕]] || 2세기 || 아래의 위구태왕과는 다른 인물. 시왕의 태자. || || [[부태왕]] || 2세기 || 167년에 현토를 공격함. || || [[위구태왕#s-2|위구태왕]] || 2세기 || 위의 위구태왕과는 다른 인물. 공손도 가문의 여자와 혼인함. || || [[간위거왕]] || 2 ~ 3세기 || || || [[마여왕]] || 3세기 || 간위거왕의 서자. 간위거왕이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뒤를 이음. || || [[의려왕]] || ? ~ 285 || 마여왕의 아들. 6세에 즉위함. || || [[의라왕]] || 286 ~ ? || || || [[현왕]] || ? ~ 346 || 마지막 왕? || 현왕 이후 부여는 494년에야 완전히 멸망하였으나, 현왕 이후로 세력이 급속히 쇠약해져[* 왕을 포함한 왕족들이 모두 중국으로 끌려간다.] 현왕을 사실상 마지막 왕으로 친다. 이후 [[여울(부여)|여울]](餘蔚)[* 현왕이 끌려간 뒤에 낳은 아들로 보인다. 서기 384년에 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잔왕(孱王)[* 잔(孱)의 뜻은 '잔약하다, 나약하다'이다.] 등이 기록에 보이나 계보가 확실하지 않다. == 기타 == * 112년에 부여의 왕이 낙랑을 공격했다. * 121년에는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인솔해 현토를 포위할 때 부여왕의 아들인 위구태를 보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와 군과 힘을 합쳐 그들을 격파했다. * 220-226년 연간에 [[읍루]]가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부여가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다. * 167년에 부여왕 부태가 현토를 공격했다가 공손역에게 격파되었다. * 285년에 모용부가 동쪽으로 부여를 공격하자 의려왕이 자살했고 그의 자제들은 도망가 옥저로 들어갔다. [각주] [[분류:부여]] 부여/왕사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