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목차] == 개요 == http://www.ecotour.go.kr/petition/sightsee_data/%EB%B6%81%ED%95%9C%EC%82%B0%EC%84%B1.jpg ~~[[북한]]~~ [[북한산]]에 있는 산성. --[[개그 콘서트]]에서 [[남한산성]]과 함께 매주 [[감수성|함락되던 성]][* 다만 개그콘서트 [[감수성]]의 배경이 [[청나라]]가 침략했던 [[병자호란]] 무렵이라고 한다면 저 고증은 틀렸다. 아래에도 언급하겠지만 북한산성은 [[숙종(조선)|숙종]]대 이후에 지어진 산성이다.]-- [[북한산]]의 백운대,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km이며 내부 면적은 6.2km² 정도로 [[여의도]]의 약 1/3에 달한다.[* 여기서 기준으로 한 여의도 면적은 여의도동의 면적으로 여의도 자체면적으로만 하면 여의도보다 크다.] 이렇게 크기 때문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우이동, [[종로구]]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에 걸쳐있으며, 남쪽과 동쪽 성벽이 경기도와 서울을 나누는 기점이 된다.[* 분명 성은 고양시와 서울시에 걸쳐있는데 안내판 사업도 그렇고 두 지자체간 협의되어 진행된 사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심지어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이는 북한산이 수도권에서 유일한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의 명승이며 고양시 소재라고 볼 수 있으나 주된 진입로가 서울에 위치하고, 탐방객도 600만을 넘겨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인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곽과 시설물에 대한 서울시 제작 안내문에는 소재지 소개에 고양시가 쏙 빠져있었다. 지금은 서로 협력관계라는데 어느정도 진행되었는지는 [[추가바람]]] == 역사적 기록 ==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 [[개루왕]]이 한수 북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 39년 재위한 개루왕의 유일한 치적이다...]과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뒤 한강 이북으로 도성을 옮기고 이후 [[비류왕]] 때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되었고, [[개로왕]]이 [[도림]]의 꼬임에 넘어가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아차산이었다는 주장도 큰 힘을 얻고 있다. 여긴 한강 이남 백제성들과 가까우니까.] 이후 [[신라]]가 [[진흥왕]] 때에 북한산성에서 [[고구려]]와 피튀기는 전쟁을 벌였다고 되어있고, 북한산순수비가 현 북한산성과 가까운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 위치에 당시에도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북한산 지역에 삼국시대 성터가 확인되지 않은 점과 2016년 삼국시대 축조된 아차산성 발굴에서 '북한산성' 관련 기와가 나와서 삼국시대 때의 북한산성은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려]] 때에 들어서면 [[현종(고려)|현종]]이 [[천추태후]]에 의해 승려가 되어 지금의 진관사인 신혈사에 유폐됐다는 기록과 [[왕건]]의 재궁(관)을 [[여요전쟁#s-4|거란의 3차 침입]] 때 향림사로 피신시켰다는 등 [[북한산]]에 관련된 기록은 있으나[* 사실 저 두사건을 제외하면 남는 기록은 거의 대부분 "삼각산에 왕이 행차했다." "삼각산이 무너졌다." 이다.]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있는 중흥산성에 주둔했다는 기록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문종]]이 [[밀덕후]]군주 답게 [[한양]]주변의 요충지와 [[한양|도성]]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 위치에 산성을 쌓자고 말했지만, 백성만 고생한다는 신료들의 만료로 무산되었으며 --이때 만들었으면 나중에 더 큰 [[임진왜란|개고생]]은 안했겠지--, 이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덕형]]을 보내서 북한산을 정찰하게 하는데, 이덕형은 산세가 험하고 방어에 좋고, 고려 때 주둔한 흔적이 있으니 우리도 여기에 성을 쌓자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는 전후 재정빈곤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때라도 준비했으면 덜 [[병자호란|고생]]했겠지--. 결국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도성]]과 바로 연결되는 배후 산성이 절실하게 되어 무려 40여년간의 축성논의 끝에 [[숙종(조선)|숙종]] 37년(1711년)에 완료되는데 긴 논의 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은 데에는 단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당시 청에서 해구의 준동이 있으니 대비하란 언질을 바탕으로 급하게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산성을 쌓은 이유는 [[병자호란#s-4|병자호란]] 참조][* 하지만 숙종 당대에도 "[[남한산성]]보다 한양과의 거리가 더 멀어서 유기적이지 못하다.", "한양 날아갈 정도면 북한산성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박시백 화백이 이 떡밥에 낚인 것도 안자랑.~~] 성을 쌓은 [[숙종(조선)|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조선)|정조]]가 왔다갔다고 하며 사도세자는 여기에 온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항목 참조. 정조는 왕이 돼서는 --융릉 참배 가느라-- 와보지 않았으며 이후 손자인 [[효명세자]]가 중흥사를 왕실 원찰로 삼고 중창하고 후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 효명세자 이름으로 불사를 했다고 한다.--[[효령대군]]이나 [[세조(조선)|세조]] 도 아니고-- 매우 의외의 일인데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왕조의 왕세자가 이름만 걸었다고 해도 불사를 후원한 것이다. 이 시기 쯤 되면 억불에 대한 자세도 약간 바뀌긴 한다. [[영조]]도 후사를 못보니까 신하들이 불사하라고 했다.] [[고종(조선)|고종]] 때는 [[엄귀비]]가 찾아와 지금의 무량사를 창건하고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엄귀비는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백일기도를 해 [[영친왕]]을 얻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량사에는 엄귀비가 모셨다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 그 외에도 각종문집에 북한산에서 놀고 갔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며 이중에는 성호 [[이익(실학자)|이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있다. == 내부시설 == 성의 시설로는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에는 초루가 설치되었고,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과 수문이 설치되었다. 성곽에는 성문이외에 시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 동장대만 복원 됐고 나머지는 그냥 푯말만 꼿혀 있다.]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 1915년 대홍수로 박살이 났다. 당시 성공회에 임차해주었는데 내전건물 하나 남기고 다 떠내려가서 관리인까지 사망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지금 다시 복원을 추진 중인듯. 사진이 남아 있어서 원형모양대로 복원에 문제는 없는다고 한다. 현재 행궁터는 발굴사업중이라는 푯말과 함께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을 건립하였다. 또한 주둔부대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유영지 3개소,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 3개소, 성곽의 관리와 방어를 분담한 [[승병]]들이 주둔할 승영사찰 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유사시 도성민들이 전부 들어가 항전할 때 필요 식량을 대략 계산한 결과, 무려 '''10만석'''[* 부피단위로 환산하면 18039000 [[리터]](ℓ)가 나오며, 오늘날의 도정된 쌀 무게단위로 하면 1600톤이 된다.(경기도 기준)]의 곡식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에 그 많은 곡식을 산성 내에 쌓기는 힘들다고 산 아래에 창고를 지금의 [[평창동]]에다 '''평창'''이란 이름으로 만들고 5만석을 여기에 비치하게 된다.--이로 인해 평창동은 다른 지명 필요없이 평창동 확정--[* 게다가 평창동에는 이미 선혜청 평창이 있었다. 즉 큰 창고만 두개가 생긴 것, 한강과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 창고가 두개나 들어선 이유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 사이에 있어 유사시 방어가 용이하고 --부암동의 그 언덕길을 넘어야 하지만-- 창의문으로 미곡의 출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한강에선 홍제천을 따라 들어오기 편하고 도성의 혼잡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성벽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고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여장을 쌓을 시점에 이르러 [[겨울]]이 다가와 여장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다. 여장을 깬돌로 쌓으면서 진흙으로 그 빈틈을 속채움하고 바깥에는 석회를 발랐다. 문제는 이러면 여장이 겨울이 지나면 수축과 팽창 덕분에 무너진다는것...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러 원 모습이 남아있는 여장은 없으며, 정조 때도 순조 때도 걸핏하면 관리소홀이다, 수리해야 한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순조 때 행궁을 포함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있는데 --기껏 헬기로 돌을 날라가며 개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서울시 복원구간의 여장은 [[한양도성]]의 여장을 베껴 만들어 성 내에서 성 바깥이 안보이는 등, 원형과 여장기능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현황파악도 매우 어려운데 북한산의 지형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부 성벽잔존구간은 접근조차 힘든 절벽위에 있으며 분명 성벽 뒤편으로 나 있었을 순찰로가 침식되어 사라지고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성벽 잔존구간 위로 지나가게 되어 훼손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비봉능선에서 북한산으로 이르는 문수봉 구간은 심지어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성벽이 파괴되어 있다. 또한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할 성랑지는 등산객들의 휴식 및 식사장소로 걸핏하면 이용되어 초석의 위치가 바뀌고 지표에 남은 와전류가 훼손되는 현실이다. 성곽시설 중 암문 중에 시체를 내보내기 위한 시구문이 있는 점, 성문의 여장이 평여장[* 돌을 여러개 쓰지 않고 한개의 돌로 다듬어서 만듦]인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동 시기 산성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산성은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이점은 [[수원화성]]과 동일하다.], [[임금]]의 행차가 몇 번 있었으나 행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특징이 있다. 산성의 정문은 대성문이었으나 지형상 문제로 [[숙종(조선)|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했으며 [[영조]]는 대성문으로 '''내시 등에 업혀서'''[* 물론 어가를 타고 오다가 올라올 수 없는 구간부터 업혀서 올라왔다.--[[내시]] 다 죽겠다 이것들아-- 이러나 저러나 내시들이 무관만큼 튼튼한 것을 보여준 셈이다.] 들어왔다. 거기에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이었던 지금의 대남문으로 나가버려 --[[내가 고자라니|이게 무슨 말이요 어가가 암문으로 나가다니]]--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순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 지금의 대남문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미 반파되어 있던 북문 누각부재를 옮겨서 만들자는 의논이 실록에 남아있다.--북문 [[지못미]]-- == 가는 길 == [[북한산]]이 워낙 큰 산이라 올라가는 길도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남한산성]]처럼 내부로 [[버스]]가 다닌다거나, 차량을 끌고갈 수 있는건 아니기에 성을 둘러보려면 어느정도 고생은 감수해야한다. 정상인 백운대를 가게 되면 항상 위문과 백운대로 연결된 성벽일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간의 성벽이 가장 두껍다. 제대로된 성벽을 둘러 보고 싶으면 대동문, 대서문과 같은 각종 성문을 검색해서 가도록 하자.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서울 버스 704]]번(주말 한정 [[서울 버스 8772|8772번]]도) 경기 버스 34번을 타면 은평뉴타운을 지나 삼천사, 흥국사, 백화사, 북한산성입구, 송추로 갈 수 있는데 전부 북한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목이다. 평창동, 우이동, 구기동, 정릉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 == 바깥고리 == [[http://blog.naver.com/buksamo|북한산성문화사업팀 공식블로그]] [[분류:산성]] 북한산성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