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 북한산에 있는 산성. 개그 콘서트에서 남한산성과 함께 매주 함락되던 성[1]
북한산의 백운대,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km이며 내부 면적은 6.2km² 정도로 여의도의 약 1/3에 달한다.[2] 이렇게 크기 때문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우이동, 종로구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에 걸쳐있으며, 남쪽과 동쪽 성벽이 경기도와 서울을 나누는 기점이 된다.[3]
2 역사적 기록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 개루왕이 한수 북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4]과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뒤 한강 이북으로 도성을 옮기고 이후 비류왕 때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되었고, 개로왕이 도림의 꼬임에 넘어가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5] 이후 신라가 진흥왕 때에 북한산성에서 고구려와 피튀기는 전쟁을 벌였다고 되어있고, 북한산순수비가 현 북한산성과 가까운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 위치에 당시에도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북한산 지역에 삼국시대 성터가 확인되지 않은 점과 2016년 삼국시대 축조된 아차산성 발굴에서 '북한산성' 관련 기와가 나와서 삼국시대 때의 북한산성은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려 때에 들어서면 현종이 천추태후에 의해 승려가 되어 지금의 진관사인 신혈사에 유폐됐다는 기록과 왕건의 재궁(관)을 거란의 3차 침입 때 향림사로 피신시켰다는 등 북한산에 관련된 기록은 있으나[6]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있는 중흥산성에 주둔했다는 기록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문종이 밀덕후군주 답게 한양주변의 요충지와 도성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 위치에 산성을 쌓자고 말했지만, 백성만 고생한다는 신료들의 만료로 무산되었으며 이때 만들었으면 나중에 더 큰 개고생은 안했겠지, 이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덕형을 보내서 북한산을 정찰하게 하는데, 이덕형은 산세가 험하고 방어에 좋고, 고려 때 주둔한 흔적이 있으니 우리도 여기에 성을 쌓자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는 전후 재정빈곤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때라도 준비했으면 덜 고생했겠지. 결국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과 바로 연결되는 배후 산성이 절실하게 되어 무려 40여년간의 축성논의 끝에 숙종 37년(1711년)에 완료되는데 긴 논의 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은 데에는 단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7][8]
성을 쌓은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가 왔다갔다고 하며 사도세자는 여기에 온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항목 참조. 정조는 왕이 돼서는 융릉 참배 가느라 와보지 않았으며 이후 손자인 효명세자가 중흥사를 왕실 원찰로 삼고 중창하고 후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9]
고종 때는 엄귀비가 찾아와 지금의 무량사를 창건하고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엄귀비는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백일기도를 해 영친왕을 얻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량사에는 엄귀비가 모셨다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
그 외에도 각종문집에 북한산에서 놀고 갔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며 이중에는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있다.
3 내부시설
성의 시설로는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에는 초루가 설치되었고,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과 수문이 설치되었다. 성곽에는 성문이외에 시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10]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11]을 건립하였다. 또한 주둔부대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유영지 3개소,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 3개소, 성곽의 관리와 방어를 분담한 승병들이 주둔할 승영사찰 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유사시 도성민들이 전부 들어가 항전할 때 필요 식량을 대략 계산한 결과, 무려 10만석[12]의 곡식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에 그 많은 곡식을 산성 내에 쌓기는 힘들다고 산 아래에 창고를 지금의 평창동에다 평창이란 이름으로 만들고 5만석을 여기에 비치하게 된다.이로 인해 평창동은 다른 지명 필요없이 평창동 확정[13]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성벽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고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여장을 쌓을 시점에 이르러 겨울이 다가와 여장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다. 여장을 깬돌로 쌓으면서 진흙으로 그 빈틈을 속채움하고 바깥에는 석회를 발랐다. 문제는 이러면 여장이 겨울이 지나면 수축과 팽창 덕분에 무너진다는것...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러 원 모습이 남아있는 여장은 없으며, 정조 때도 순조 때도 걸핏하면 관리소홀이다, 수리해야 한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순조 때 행궁을 포함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있는데 기껏 헬기로 돌을 날라가며 개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서울시 복원구간의 여장은 한양도성의 여장을 베껴 만들어 성 내에서 성 바깥이 안보이는 등, 원형과 여장기능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현황파악도 매우 어려운데 북한산의 지형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부 성벽잔존구간은 접근조차 힘든 절벽위에 있으며 분명 성벽 뒤편으로 나 있었을 순찰로가 침식되어 사라지고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성벽 잔존구간 위로 지나가게 되어 훼손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비봉능선에서 북한산으로 이르는 문수봉 구간은 심지어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성벽이 파괴되어 있다. 또한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할 성랑지는 등산객들의 휴식 및 식사장소로 걸핏하면 이용되어 초석의 위치가 바뀌고 지표에 남은 와전류가 훼손되는 현실이다.
성곽시설 중 암문 중에 시체를 내보내기 위한 시구문이 있는 점, 성문의 여장이 평여장[14]인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동 시기 산성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산성은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15], 임금의 행차가 몇 번 있었으나 행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특징이 있다.
산성의 정문은 대성문이었으나 지형상 문제로 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했으며 영조는 대성문으로 내시 등에 업혀서[16] 들어왔다. 거기에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이었던 지금의 대남문으로 나가버려 이게 무슨 말이요 어가가 암문으로 나가다니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순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 지금의 대남문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미 반파되어 있던 북문 누각부재를 옮겨서 만들자는 의논이 실록에 남아있다.북문 지못미
4 가는 길
북한산이 워낙 큰 산이라 올라가는 길도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남한산성처럼 내부로 버스가 다닌다거나, 차량을 끌고갈 수 있는건 아니기에 성을 둘러보려면 어느정도 고생은 감수해야한다. 정상인 백운대를 가게 되면 항상 위문과 백운대로 연결된 성벽일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간의 성벽이 가장 두껍다. 제대로된 성벽을 둘러 보고 싶으면 대동문, 대서문과 같은 각종 성문을 검색해서 가도록 하자.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서울 버스 704번(주말 한정 8772번도) 경기 버스 34번을 타면 은평뉴타운을 지나 삼천사, 흥국사, 백화사, 북한산성입구, 송추로 갈 수 있는데 전부 북한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목이다.
평창동, 우이동, 구기동, 정릉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
5 바깥고리
북한산성문화사업팀 공식블로그- ↑ 다만 개그콘서트 감수성의 배경이 청나라가 침략했던 병자호란 무렵이라고 한다면 저 고증은 틀렸다. 아래에도 언급하겠지만 북한산성은 숙종대 이후에 지어진 산성이다.
- ↑ 여기서 기준으로 한 여의도 면적은 여의도동의 면적으로 여의도 자체면적으로만 하면 여의도보다 크다.
- ↑ 분명 성은 고양시와 서울시에 걸쳐있는데 안내판 사업도 그렇고 두 지자체간 협의되어 진행된 사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심지어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이는 북한산이 수도권에서 유일한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의 명승이며 고양시 소재라고 볼 수 있으나 주된 진입로가 서울에 위치하고, 탐방객도 600만을 넘겨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인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곽과 시설물에 대한 서울시 제작 안내문에는 소재지 소개에 고양시가 쏙 빠져있었다. 지금은 서로 협력관계라는데 어느정도 진행되었는지는 추가바람
- ↑ 39년 재위한 개루왕의 유일한 치적이다...
- ↑ 아차산이었다는 주장도 큰 힘을 얻고 있다. 여긴 한강 이남 백제성들과 가까우니까.
- ↑ 사실 저 두사건을 제외하면 남는 기록은 거의 대부분 "삼각산에 왕이 행차했다." "삼각산이 무너졌다." 이다.
- ↑ 이 당시 청에서 해구의 준동이 있으니 대비하란 언질을 바탕으로 급하게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산성을 쌓은 이유는 병자호란 참조
- ↑ 하지만 숙종 당대에도 "남한산성보다 한양과의 거리가 더 멀어서 유기적이지 못하다.", "한양 날아갈 정도면 북한산성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박시백 화백이 이 떡밥에 낚인 것도 안자랑. - ↑ 효명세자 이름으로 불사를 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이나 세조 도 아니고매우 의외의 일인데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왕조의 왕세자가 이름만 걸었다고 해도 불사를 후원한 것이다. 이 시기 쯤 되면 억불에 대한 자세도 약간 바뀌긴 한다. 영조도 후사를 못보니까 신하들이 불사하라고 했다. - ↑ 동장대만 복원 됐고 나머지는 그냥 푯말만 꼿혀 있다.
- ↑ 1915년 대홍수로 박살이 났다. 당시 성공회에 임차해주었는데 내전건물 하나 남기고 다 떠내려가서 관리인까지 사망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지금 다시 복원을 추진 중인듯. 사진이 남아 있어서 원형모양대로 복원에 문제는 없는다고 한다. 현재 행궁터는 발굴사업중이라는 푯말과 함께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 ↑ 부피단위로 환산하면 18039000 리터(ℓ)가 나오며, 오늘날의 도정된 쌀 무게단위로 하면 1600톤이 된다.(경기도 기준)
- ↑ 게다가 평창동에는 이미 선혜청 평창이 있었다. 즉 큰 창고만 두개가 생긴 것, 한강과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 창고가 두개나 들어선 이유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 사이에 있어 유사시 방어가 용이하고
부암동의 그 언덕길을 넘어야 하지만창의문으로 미곡의 출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한강에선 홍제천을 따라 들어오기 편하고 도성의 혼잡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 ↑ 돌을 여러개 쓰지 않고 한개의 돌로 다듬어서 만듦
- ↑ 이점은 수원화성과 동일하다.
- ↑ 물론 어가를 타고 오다가 올라올 수 없는 구간부터 업혀서 올라왔다.
내시 다 죽겠다 이것들아이러나 저러나 내시들이 무관만큼 튼튼한 것을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