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송나라/황제]] ||||||||||||<:><tablealign=center><#002984> '''[[남송#s-6|{{{#ffffff 남송의 역대 황제}}}]]''' || ||<width=30%> 17대 [[송단종|단종]] 민황제 조하 || {{{+1 ←}}} ||<width=30%> '''18대 소황제 조병''' || {{{+1 →}}} ||<width=30%> [[원나라|원]] 1대 [[쿠빌라이 칸|세조]] 쿠빌라이 || ||||||<tablealign=center>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b/Zhaori.jpg?width=300 || || '''[[묘호]]''' || 없음 / '''[[회종]](懷宗)'''[* 소제의 묘호 또는 제호(帝號)이다.] || || '''[[시호]]''' || 없음 || || '''[[연호]]''' || 상흥(祥興, 1278년 5월 ~ 1279년 2월) || || '''[[성]]''' || 조(趙) || || '''[[휘]]''' || 병(昺) || || '''생몰기간''' || 1272년 2월 12일 ~ 1279년 3월 19일 || || '''재위기간''' || 1278년 5월 10일 ~ 1279년 3월 19일 || 이름은 조병(趙昺), 재위기간은 1278~1279. 정식 [[묘호]], [[시호]]가 없어서 [[소제|소황제]], 유주(幼主), 위왕(衛王)[* 즉위하기 전까지 받았던 작위.], 즉위 당시에 사용한 연호인 상흥(祥興)에서 따온 상흥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그의 형이 항복한 뒤 마지막 황제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따로 묘호와 시호를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도종]]의 7남으로 수용 유씨 소생이다. 이복 형 단종과 함께 수도 임안이 함락되자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중 등 일부 무관들과 문관들에 의해 보호되어 남쪽에서 항거했다. 단종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요절]]하자 육수부에 의해 옹립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들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군이 보강되어 전투에 매우 유리했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을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소제는 배 안에서 신하들과 동고동락했으며 육수부는 몸소 황제에게 경서 강독을 했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3월에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패배하자 절망한 신하들은 차례로 물 속에 투신했다. 그리고 육수부는 [[송공제|덕우 황제]]의 치욕을 보이면 안된다면서 어린 황제를 업고 물 속에 뛰어내렸다. 이 때 소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으리'하며 죽었다고 한다. 뒤이어 태후, 황족들도 물 속에 뛰어내렸다. 이미 임안 함락으로 사실상 멸망했던 남송은 이 전투의 대패와 소제의 죽음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소제와 육수부 등의 시신은 파도를 따라 해변으로 밀려왔고 이를 안타까워 여긴 사람들이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소제,version=113)]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문서 가져옴 (원본 보기) 송소제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