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소제

남송의 역대 황제
17대 단종 민황제 조하18대 소황제 조병 1대 세조 쿠빌라이
묘호없음 / 회종(懷宗)[1]
시호없음
연호상흥(祥興, 1278년 5월 ~ 1279년 2월)
조(趙)
병(昺)
생몰기간1272년 2월 12일 ~ 1279년 3월 19일
재위기간1278년 5월 10일 ~ 1279년 3월 19일

이름은 조병(趙昺), 재위기간은 1278~1279.

정식 묘호, 시호가 없어서 소황제, 유주(幼主), 위왕(衛王)[2], 즉위 당시에 사용한 연호인 상흥(祥興)에서 따온 상흥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그의 형이 항복한 뒤 마지막 황제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따로 묘호와 시호를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도종의 7남으로 수용 유씨 소생이다. 이복 형 단종과 함께 수도 임안이 함락되자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중 등 일부 무관들과 문관들에 의해 보호되어 남쪽에서 항거했다. 단종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요절하자 육수부에 의해 옹립되었다. 당시 원나라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들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군이 보강되어 전투에 매우 유리했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을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소제는 배 안에서 신하들과 동고동락했으며 육수부는 몸소 황제에게 경서 강독을 했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3월에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패배하자 절망한 신하들은 차례로 물 속에 투신했다. 그리고 육수부는 덕우 황제의 치욕을 보이면 안된다면서 어린 황제를 업고 물 속에 뛰어내렸다. 이 때 소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으리'하며 죽었다고 한다. 뒤이어 태후, 황족들도 물 속에 뛰어내렸다. 이미 임안 함락으로 사실상 멸망했던 남송은 이 전투의 대패와 소제의 죽음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소제와 육수부 등의 시신은 파도를 따라 해변으로 밀려왔고 이를 안타까워 여긴 사람들이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1. 이동 소제의 묘호 또는 제호(帝號)이다.
  2. 이동 즉위하기 전까지 받았던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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