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문서 : [[신라]][[분류:국가(10세기)]][[분류:후삼국시대]][[분류:신라]] [include(틀:한국의 역사)] ||||<tablealign=right><:><#4A2d5b>'''{{{#white 신라}}}''' [br] '''{{{#white 新羅 }}}''' || ||<:>[[파일:신라기.png|width=130]]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4/Seal_of_Silla.png/258px-Seal_of_Silla.png?width=100|| ||<:> [[군기#s-2|군기]] ||<:> [[도장|인장]] || ||<-2><:>http://study.zumst.com/upload/00-I22-00-34-10/%ED%9B%84%EC%82%BC%EA%B5%AD%EC%9D%98%EC%84%B1%EB%A6%BD.png?width=250|| ||위치||[[한반도]] 동남부|| ||[[수도]]||[[서라벌]]|| ||정치체제||[[군주제]]|| ||[[국성]]||[[경주 김씨]][* [[경애왕]](박위응)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죽고 56대 [[경순왕]](김부)이 왕이 되면서 국성이 되었다], [[밀양 박씨]][* 53대[[신덕왕]]~55대 [[경애왕]]]|| ||주요국왕||[[진성여왕]][br][[경애왕]][br][[경순왕]] || ||[[언어]]||[[신라어]],[[한국어#s-4.1|고대 한국어]]|| ||[[종족]]||[[한민족]] 등|| ||[[종교]]||[[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 ||주요 사건||[[원종]],[[애노]]의난[br][[대야성 전투#s-3|대야성전투]]|| ||존속기간||[[기원후|A.D]].892~935 (43년)|| ||성립 이전||[[통일신라]]|| ||멸망 이후||[[고려]]|| [목차] == [[개요]] == '''[[통일신라]]가 다시 삼국으로 분리되 [[후삼국시대]]에 들어 다시 [[경상도]] 인근 지역으로 축소된 말기 40여년의 기간.''' 후삼국시대의 주역을 대부분 궁예의 [[태봉]]과 쿠테타로 나라세운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에 관심이 주로많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 [[역사]] == [[남북국시대]] [[통일신라]]가 [[8세기]] 후반에 들어서 국가 내에서 왕위를 놓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지역 민심을 돌보지 않으면서 점차 지방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단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비뇌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크게 [[궁예]]와 [[견훤]]이 부상하게 되며 이들은 옛 삼국을 부흥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왕에 오르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옛 [[통일신라]]의 북쪽은[[ 궁예]]가 [[태봉|후고구려]]를 세웠고, 서남쪽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신라는 [[진흥왕]] 이전처럼 다시 [[경상도]] 일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했다. == [[영토]] == [[후삼국시대]] 지도에서는 보통 [[신라]]가 통일 이전 영토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후삼국시대 시기별로도 꽤 차이가 난다. 우선 [[경상도]]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강 지금의 [[경상남도]] 대부분 지역은 후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울산광역시|울산]] 지역에는 호족 박윤웅이 반독립상태였고 [[김해시|김해]]의 김인광은 [[가야]]의 부활을 기도했으며 [[진주시|진주]]의 [[왕봉규]]는 아예 [[중국]]에 독자적으로 [[조공]]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떼 [[적고적]]의 거점도 있었으니 경남 지역은 전부 사실상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만 김인광 세력은 지나치게 독립노선을 걷다가 [[소충자]] [[소율희]] 형제에게 밀려났고, 소씨 형제는 신라 조정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남쪽은 다시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 [[후백제]]의 공격을 막을 요충지 [[대야성]]과 경북지역 대부분은 그나마 신라의 충신들이 남아있어 후백제의 공격을 수 차례나 자력으로 막아내고 왕건에게 원군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영향력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920년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927년에 후백제군에게 서라벌이 함락당하고 [[경애왕]]이 살해당하는 과정을 거쳐 우호적인 제세력도 궤멸당하거나 고려와 후백제에 줄지어 항복해버려 최종적으로 신라 조정은 사실상 [[서라벌]] 인근만 통치하는 [[안습|안습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로는 [[후백제]]나 [[고려]]나 [[신라]]는 일단 놔두었기에 10여년 정도 그냥 있다가 고려에 투항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사실 경애왕 시절에도 지금의 영천인 고울부가 고려에 귀순을 청할정도로 엉망이긴 했다. == [[정치]] == 여느 나라들의 말기가 그렇듯 상당히 혼란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진성여왕]]과 [[효공왕]]은 기록상 사치향락을 계속했으며, 이후 박경휘가 [[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부활했다.[*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김씨 왕조가 나라 분열의 책임을 지고 영향력이 떨어졌는지 이후 계속 박씨가 왕위를 잇게 된다.]김씨들도 당연히 가만 있지는 않아서, 918년에는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김현승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다들 신경쓰지 않고 있을 때 서라벌 조정에서는 열심히 김씨 vs 박씨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의 삽질로 암군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재평가 받은 것들/인물|최근에는 정황상 균형외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망해가는 국운을 살려보려고 애썼던 왕으로 재평가받는 편이다. [[경애왕]] 문서 참조. [[태조 왕건]] 등 창작물에서는 [[견훤]]의 [[서라벌]] 기습공격도 김씨 일부 [[간신]]들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박씨 왕을 해치워달라고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 [[외교]] == 태봉와의 관계는 [[궁예]]의 [[태봉]]국은 시종일관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포로는 필요없다#s-1|모두 죽였다고]]'''할 정도로 적대적으로 대해왔던만큼 [[교류]]는 사실상 없었다. [[태봉]]을 쿠테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비교적 [[신라]]를 떠받들어주고 시종일관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대한 편이었다. 다만 [[신라]]가 여력을 완전히 잃고 [[서라벌]]로 축소된 시기에 가서는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후백제와의 관계는 [[견훤]]의 [[후백제]]도 내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나 경애왕을 잔혹하게 처단한 사례 때문에 극단적인 반신라파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신라]][[왕]]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과 [[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제(帝)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애왕 처단 후 그것이 신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김씨 왕 경순왕을 다시 세운 것도 견훤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반신라정책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5대10국와도 관계를 맺었는데 점점 약화되가고 있는과정속에서도 중국의 [[5대10국]]에 사신을 보내는등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다 == 역대군주 == [[진성여왕]]~[[경순왕]] 까지가 [[후삼국시대]]의 신라의 군주이다. == 다중매체 == * [[태조왕건]][* 후삼국시대을 다룬 드라마이다.] == 관련문서 == * [[경애왕]] * [[경순왕]] * [[견훤]] * [[현춘]] * [[후삼국시대]] * [[대야성]] == 비슷한 예시 == [[삼국시대(중국)]]의 [[후한]] 왕실에 빗대기도 하는데,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차이점은 삼국지의 한실은 [[꼭두각시]]인 기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신라]] 조정은 나름대로 도적떼나 후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어전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경애왕]]처럼 독자생존을 위한 나름대로의 외교노선을 견지하기도 했다. 이 시기 신라는 [[국력]]이 심각하게 약해지면 약해졌지 후한의 [[헌제]] 때처럼 아예 황제의 직할령이 소멸하고 [[권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는 꼭두각시 역할은 별로 하지 않았다. [[고려]]의 [[왕건]] 역시 이름만 남은 [[경순왕]] 정권을 강압이 아니라 회유로 일관했으며 결국 귀순 선택도 신라 조정이 내부의 찬반회의 끝에 스스로 하게 됐다.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한국의 역사 (원본 보기) 신라/후삼국시대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