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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 |
신라 新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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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 | 인장 |
위치 | 한반도 동남부 |
수도 | 서라벌 |
정치체제 | 군주제 |
국성 | 경주 김씨[1], 밀양 박씨[2] |
주요국왕 | 진성여왕 경애왕 경순왕 |
언어 | 신라어,고대 한국어 |
종족 | 한민족 등 |
종교 |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 |
주요 사건 | 원종,애노의난 대야성전투 |
존속기간 | A.D.892~935 (43년) |
성립 이전 | 통일신라 |
멸망 이후 | 고려 |
1 개요
통일신라가 다시 삼국으로 분리되 후삼국시대에 들어 다시 경상도 인근 지역으로 축소된 말기 40여년의 기간.
후삼국시대의 주역을 대부분 궁예의 태봉과 쿠테타로 나라세운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에
관심이 주로많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2 역사
남북국시대 통일신라가 8세기 후반에 들어서 국가 내에서 왕위를 놓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지역 민심을 돌보지 않으면서 점차 지방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단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비뇌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크게 궁예와 견훤이 부상하게 되며 이들은 옛 삼국을 부흥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왕에 오르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옛 통일신라의 북쪽은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고, 서남쪽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신라는 진흥왕 이전처럼 다시 경상도 일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했다.
3 영토
후삼국시대 지도에서는 보통 신라가 통일 이전 영토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후삼국시대 시기별로도 꽤 차이가 난다. 우선 경상도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강 지금의 경상남도 대부분 지역은 후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울산 지역에는 호족 박윤웅이 반독립상태였고 김해의 김인광은 가야의 부활을 기도했으며 진주의 왕봉규는 아예 중국에 독자적으로 조공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떼 적고적의 거점도 있었으니 경남 지역은 전부 사실상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3]
후백제의 공격을 막을 요충지 대야성과 경북지역 대부분은 그나마 신라의 충신들이 남아있어 후백제의 공격을 수 차례나 자력으로 막아내고 왕건에게 원군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영향력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920년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927년에 후백제군에게 서라벌이 함락당하고 경애왕이 살해당하는 과정을 거쳐 우호적인 제세력도 궤멸당하거나 고려와 후백제에 줄지어 항복해버려 최종적으로 신라 조정은 사실상 서라벌 인근만 통치하는 안습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로는 후백제나 고려나 신라는 일단 놔두었기에 10여년 정도 그냥 있다가 고려에 투항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사실 경애왕 시절에도 지금의 영천인 고울부가 고려에 귀순을 청할정도로 엉망이긴 했다.
4 정치
여느 나라들의 말기가 그렇듯 상당히 혼란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진성여왕과 효공왕은 기록상 사치향락을 계속했으며, 이후 박경휘가 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부활했다.[4]김씨들도 당연히 가만 있지는 않아서, 918년에는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김현승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다들 신경쓰지 않고 있을 때 서라벌 조정에서는 열심히 김씨 vs 박씨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의 삽질로 암군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정황상 균형외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망해가는 국운을 살려보려고 애썼던 왕으로 재평가받는 편이다. 경애왕 문서 참조.
태조 왕건 등 창작물에서는 견훤의 서라벌 기습공격도 김씨 일부 간신들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박씨 왕을 해치워달라고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5 외교
태봉와의 관계는 궁예의 태봉국은 시종일관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할 정도로 적대적으로 대해왔던만큼 교류는 사실상 없었다.
태봉을 쿠테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비교적 신라를 떠받들어주고 시종일관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대한 편이었다. 다만 신라가 여력을 완전히 잃고 서라벌로 축소된 시기에 가서는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후백제와의 관계는 견훤의 후백제도 내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나 경애왕을 잔혹하게 처단한 사례 때문에 극단적인 반신라파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신라왕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과 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제(帝)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애왕 처단 후 그것이 신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김씨 왕 경순왕을 다시 세운 것도 견훤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반신라정책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5대10국와도 관계를 맺었는데 점점 약화되가고 있는과정속에서도 중국의 5대10국에 사신을 보내는등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