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항문 : [[기업인]] http://www.viva100.com/mnt/images/file/2015y/08m/06d/2015080601000241200010061.jpg?width=300 愼鏞鎬 1917년 8월 11일 ~ 2003년 9월 19일 [목차] == 개요 == [[전라남도]] [[영암군]] 출생. 교보그룹의 창업주이며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신(성씨)|거창 신씨]]. [[여담]]이지만 대산문학상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 생애 == [[1917년]] [[8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과 [[모친]] 유매순 [[자식|슬하]] 6형제중 다섯째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계속 [[감옥]]에 있는지라 어머니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7살때는 [[병|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으나 10살때 다행히 즈음 병이 호전됬지만 [[학교]]엔 가진 못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 여자형제가 없는 집안에 형들이 [[독립운동가|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문학가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사업의 길을 걸었다. [[약관]][* 20세를 뜻한다.])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노하우를 버리고 맨손으로 귀국했다. 귀국후 첫번째 사업으로 [[전라북도]]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세웠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바로 해체됬다. 수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는 돈이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이는 훗날 세계 최강 교육열의 나라가 되었다-- 한국 어머니, 아버지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 결국 생·로·병·사 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먹고 살기도 바쁜데 [[1940년대]]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보험은 오로지 수탈 방식이었다.--[[일본놈]]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전쟁 직후인지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은 대부분 휴식기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20대 이상 성인남성의 열의 여덟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래왔다. 당시에는 담배를 안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무작정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가입하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요구한 것이다. 창업 초기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소재의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립했다. 교육보험업계의 시작이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거의 전무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한 결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을 만들었다.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간부들은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그닥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만일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크게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 [[교보문고]]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대]] 들어 늘어난 경제성장과 함께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때가 되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변해가는 고객 요구에 따라서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늘어났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결국 '교보생명’으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당시 급격하게 성장한 [[삼성생명]]에 밀려 교보생명은 결국 1위를 내주고 말았다.--그리고 그 후 변동은 없었다-- 77세가 되던 해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이상한 징후가 발견됐다. 병명은 담도암.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어두운 곳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 재활물리치료 를 받으면서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19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러나 8년 뒤 완치된 암이 다시 간으로 전이되었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였다. == 가족 == 형제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했는데, 6형제 중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인 신용희 전 회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애국운동에 몸을 실었다. 첫째형인 고 신용국은 [[일제시대]]에 [[항일대도|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의 장남인 신동재가 2000년까지 교보생명의 부동산관리 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내왔다. 둘째형인 고 신용율도 형과 같이 항일운동에 몸을 담았으며, 그의 차남인 신평재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일하다가 1991년부터 창업주의 제의로 교보생명 사장 등을 맡고 있다. 셋째 형 고 신용원은 일본에 있는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던 중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맡았다. 막내 동생인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해왔으며, 한국전쟁 이후 신용호 창립자를 도와 같이 일했다. 교보생명 창립 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인재 사장은 고 신용호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받은 [[장남]]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 뜻을 거부하며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고(...). 현재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되었다. == 경력 == * 1997 -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설립 * 1995 - 교보생명보험 명예회장 * 1992 - 대산재단 이사장 * 1967 - 대교산업 회장 * 1968 ~ 1976 - 광주은행 이사 * 1967 ~ 1991 - 대한교육보험 회장 * 1964 - 생명보험협회 회장 * 1963 - 동원탄좌개발 회장 * 1958 - 대한교육보험 설립 사장 * 1953 - 동아염직 회장 * 1950 - 한양직물 전무이사 * 1947 - 평화고무 전무이사 [[분류:인물]] [[분류:기업가]] 신용호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