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문 : 기업인
愼鏞鎬
1917년 8월 11일 ~ 2003년 9월 19일
1 개요
전라남도 영암군 출생. 교보그룹의 창업주이며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거창 신씨.
여담이지만 대산문학상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2 생애
1917년 8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과 모친 유매순 슬하 6형제중 다섯째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계속 감옥에 있는지라 어머니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7살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으나 10살때 다행히 즈음 병이 호전됬지만 학교엔 가진 못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 여자형제가 없는 집안에 형들이 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문학가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사업의 길을 걸었다. 약관[1])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노하우를 버리고 맨손으로 귀국했다. 귀국후 첫번째 사업으로 전라북도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세웠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바로 해체됬다.
수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는 돈이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이는 훗날 세계 최강 교육열의 나라가 되었다 한국 어머니, 아버지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 결국 생·로·병·사 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먹고 살기도 바쁜데 1940년대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보험은 오로지 수탈 방식이었다.일본놈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전쟁 직후인지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은 대부분 휴식기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20대 이상 성인남성의 열의 여덟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2]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무작정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가입하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요구한 것이다.
창업 초기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소재의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립했다. 교육보험업계의 시작이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거의 전무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한 결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을 만들었다.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간부들은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그닥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만일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크게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 교보문고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대 들어 늘어난 경제성장과 함께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때가 되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변해가는 고객 요구에 따라서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늘어났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결국 '교보생명’으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당시 급격하게 성장한 삼성생명에 밀려 교보생명은 결국 1위를 내주고 말았다.그리고 그 후 변동은 없었다
77세가 되던 해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이상한 징후가 발견됐다. 병명은 담도암.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어두운 곳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 재활물리치료 를 받으면서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19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러나 8년 뒤 완치된 암이 다시 간으로 전이되었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였다.
3 가족
형제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했는데, 6형제 중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인 신용희 전 회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애국운동에 몸을 실었다.
첫째형인 고 신용국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의 장남인 신동재가 2000년까지 교보생명의 부동산관리 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내왔다.
둘째형인 고 신용율도 형과 같이 항일운동에 몸을 담았으며, 그의 차남인 신평재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일하다가 1991년부터 창업주의 제의로 교보생명 사장 등을 맡고 있다.
셋째 형 고 신용원은 일본에 있는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던 중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맡았다.
막내 동생인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해왔으며, 한국전쟁 이후 신용호 창립자를 도와 같이 일했다. 교보생명 창립 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인재 사장은 고 신용호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받은 장남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 뜻을 거부하며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고(...). 현재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되었다.
4 경력
- 1997 -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설립
- 1995 - 교보생명보험 명예회장
- 1992 - 대산재단 이사장
- 1967 - 대교산업 회장
- 1968 ~ 1976 - 광주은행 이사
- 1967 ~ 1991 - 대한교육보험 회장
- 1964 - 생명보험협회 회장
- 1963 - 동원탄좌개발 회장
- 1958 - 대한교육보험 설립 사장
- 1953 - 동아염직 회장
- 1950 - 한양직물 전무이사
- 1947 - 평화고무 전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