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동명이인/ㅇ]]. 다른 동명이인은 [[이시영(동명이인)]] 문서로. [include(틀:국내 정치인)] http://img.nate.com/dicimg/art/24/99/249945001.jpg?align=right [include(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이시영(李始榮) [[1869년]] [[12월 3일]] [[서울]] ~ [[1953년]] [[4월 17일]]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 한말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성재(省齋).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며. [[경주 이씨]]로서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당시 조선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부호 집안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구한말에는 평안남도관찰사[* 오늘날의 도지사. 흔히 말하는 '평양감사'라는 자리.],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 여러 고위직을 맡은 바 있다. 그러나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재산을 팔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때 판 돈이 '''당시 [[소]] 값으로 13,000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이야 소 한 마리에 한 학기 등록금 내기도 아슬아슬하다지만 당시에는 소 있는 집이 부잣집이었다. 솔직히 현 시세로 쳐도 충분히 부자다.[* 전형적인 농업사회였던 당시에 소의 가치는 지금보다 몇 배 위였다. 사실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소 한 마리 팔면 농촌에서 대학 1년 학비 정도는 충분했다. 아예 대학의 별명이 우골탑이다.--소 팔아서 대학 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현재 소 시세가 약 500만원인 걸 감안하면 간단하게만 따져도 약 '''650억'''의 재산을 보유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것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할 때 절반 이하로 후려쳐서 재산을 급매한 결과다. 제값을 다 받았다면... 그야말로 [[대인]]이 아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뭔지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 그에 비해....~~ 이후 만주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독립 운동이 잘 풀리지 않자 상해로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이 때 6형제는 엄청난 생활고를 겪었고, 이시영을 제외한 형제들은 고문사, 병사, 객사, '''아사(餓死)'''했다. 다시 말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 10대 부호에 들었던 사람인데... 당시 독립 운동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 이승만은 그를 부통령에 낙점했는데 이를 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의견이 조정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1891)|김성수]]를 불러 이시영을 부통령에 앉히겠다고 밝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 1948년 7월 20일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해[* 이회영의 손자, 그러니까 이시영의 조카손자인 정치인 [[이종찬(1936)|이종찬]]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 이시영이 피난을 거부하고 서울에 머무르려 했는데, 6월 28일 새벽에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북한 [[김두봉]]의 특사가 몰래 찾아와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부통령 선생께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 직을 승계하신 거 아닙니까? [[김일성]] 수상이 정상회담을 원하니 저랑 같이 갑시다."라고 했고 이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한 후 위기감을 느껴 피난을 나왔는데 그 직후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하마터면 북한에 끌려가 이용당할 뻔한 것.] 있던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사직했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서울특별시]] 정릉에 묻혔다가 뒤에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이장됐다.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을 돌면 묘소에 참배할 수 있다. [[경희대학교]] 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이은 이름이었으나, 설립과정에서 재정문제와 설립인가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더욱 힘들어지다가 1951년 5월 18일 재단의 부채 1,500만원을 떠안는다는 조건으로 [[조영식]]에게 팔렸다. 경희대는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이전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다지 없어보인다. 1960년에 촌스럽다는 [[안습]]한 이유로 경희대학교로 개명한 점도 그렇고... 참고로 당시의 많은 독립투사들이 그랬듯이 민족종교 [[대종교]]의 원로급 인물이기도 하다. 대종교(大倧敎) 교세 확장 및 포교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종교의 사교교질(司敎敎秩), 교단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으로도 선출됐다. [[분류:개화파]]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 [[분류:부통령]]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원본 보기) 틀:국내 정치인 (원본 보기) 이시영(정치인)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