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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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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李始榮)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
한말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성재(省齋).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며. 경주 이씨로서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당시 조선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부호 집안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구한말에는 평안남도관찰사[1],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 여러 고위직을 맡은 바 있다. 그러나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재산을 팔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때 판 돈이 당시 소 값으로 13,000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이야 소 한 마리에 한 학기 등록금 내기도 아슬아슬하다지만 당시에는 소 있는 집이 부잣집이었다. 솔직히 현 시세로 쳐도 충분히 부자다.[2]
현재 소 시세가 약 500만원인 걸 감안하면 간단하게만 따져도 약 650억의 재산을 보유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것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할 때 절반 이하로 후려쳐서 재산을 급매한 결과다. 제값을 다 받았다면... 그야말로 대인이 아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뭔지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 그에 비해....
이후 만주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독립 운동이 잘 풀리지 않자 상해로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이 때 6형제는 엄청난 생활고를 겪었고, 이시영을 제외한 형제들은 고문사, 병사, 객사, 아사(餓死)했다. 다시 말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 10대 부호에 들었던 사람인데... 당시 독립 운동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 이승만은 그를 부통령에 낙점했는데 이를 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의견이 조정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를 불러 이시영을 부통령에 앉히겠다고 밝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 1948년 7월 20일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해[3] 있던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사직했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서울특별시 정릉에 묻혔다가 뒤에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이장됐다.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을 돌면 묘소에 참배할 수 있다.
경희대학교 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이은 이름이었으나, 설립과정에서 재정문제와 설립인가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더욱 힘들어지다가 1951년 5월 18일 재단의 부채 1,500만원을 떠안는다는 조건으로 조영식에게 팔렸다. 경희대는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이전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다지 없어보인다. 1960년에 촌스럽다는 안습한 이유로 경희대학교로 개명한 점도 그렇고...
참고로 당시의 많은 독립투사들이 그랬듯이 민족종교 대종교의 원로급 인물이기도 하다. 대종교(大倧敎) 교세 확장 및 포교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종교의 사교교질(司敎敎秩), 교단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으로도 선출됐다.
- ↑ 오늘날의 도지사. 흔히 말하는 '평양감사'라는 자리.
- ↑ 전형적인 농업사회였던 당시에 소의 가치는 지금보다 몇 배 위였다. 사실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소 한 마리 팔면 농촌에서 대학 1년 학비 정도는 충분했다. 아예 대학의 별명이 우골탑이다.
소 팔아서 대학 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 ↑ 이회영의 손자, 그러니까 이시영의 조카손자인 정치인 이종찬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 이시영이 피난을 거부하고 서울에 머무르려 했는데, 6월 28일 새벽에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북한 김두봉의 특사가 몰래 찾아와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부통령 선생께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 직을 승계하신 거 아닙니까? 김일성 수상이 정상회담을 원하니 저랑 같이 갑시다."라고 했고 이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한 후 위기감을 느껴 피난을 나왔는데 그 직후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하마터면 북한에 끌려가 이용당할 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