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include(틀:건국훈장 독립장)] http://img.nate.com/dicimg/art/24/16/241643001.jpg 張道斌 1888년 10월 22일 ~ 1963년 9월 12일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교육가, 언론인. 본관은 결성(結城)이고 아호는 산운(汕耘). == 생애 == 19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중농(中農)인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제국(張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 고향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서울교육대학교|한성사범학교]]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1907년에 [[안창호]]의 주도로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8세 연상인 [[신채호]] 등과 함께 [[양기탁]]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은사 [[박은식]]의 소개로 약관의 나이에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가 되었다. 당시 와병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 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친일내각과 친일단체를 비판한 글인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1910년에는 정식 논설위원이 되었고, 그 후 논설주필로 활동했다. 이렇게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를 다니면서 법학공부를 병행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진 후인 1911년에 보전 법과를 졸업했다. 1910년 ∼ 1912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있다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1913년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곳의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崔在亨)·[[홍범도]]·[[이동휘]]·[[이상설]]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李鍾浩)의 '근업신문(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쓰기도 했다. 1916년 ∼ 1918년 병고의 몸으로 귀국,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국사'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조만식]] 교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9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사이에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영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 '조선사요령(朝鮮史要領)'·'조선위인전(朝鮮偉人傳)'·'조선역사록(朝鮮歷史錄)' 등 숱한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년 ∼ 1945년 기간에는 연해주의 [[발해]] 고적 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大韓歷史)'를 통하여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제말에는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초등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 공산언론에 대항하였다. 같은해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었다. 1947년에는 6촌 동생 장형이 [[단국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장형은 원래 [[신익희]]가 주도하던 [[국민대학교]]의 이사장이었으나, 신익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형은 신익희와 결별하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서,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단국대학교 초대학장을 지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봉직하였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당하여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노후에는 서울시사편찬위원·고등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에 사망했으며 그 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가족관계 == 슬하에 고려합섬(주, 고합그룹 전신)을 설립하였던 장치혁과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낸 장치순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역사학자]]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건국훈장 독립장 (원본 보기) 장도빈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