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빈

width=50%
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강기덕고광순고두환권기옥권오설기삼연김단야
김덕제김도원김도현김동식김마리아김상덕김상옥
김석김석진김석황김성숙김수민김이원김정익
김진묵김철김철수김학규김홍일남궁억문일민
민양기박상진박장호박재혁박희광반하경방순희
백남규백정기석호필선우혁손정도송병선송진우
송학선심남일안경신안공근안규홍안명근안승우
안태국안희제엄항섭우덕순유관순유림유석현
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241643001.jpg

張道斌

1888년 10월 22일 ~ 1963년 9월 12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교육가, 언론인. 본관은 결성(結城)이고 아호는 산운(汕耘).

2 생애

19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중농(中農)인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제국(張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 고향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1907년에 안창호의 주도로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8세 연상인 신채호 등과 함께 양기탁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은사 박은식의 소개로 약관의 나이에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가 되었다. 당시 와병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

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친일내각과 친일단체를 비판한 글인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1910년에는 정식 논설위원이 되었고, 그 후 논설주필로 활동했다.

이렇게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다니면서 법학공부를 병행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진 후인 1911년에 보전 법과를 졸업했다.

1910년 ∼ 1912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있다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1913년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곳의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崔在亨)·홍범도·이동휘·이상설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李鍾浩)의 '근업신문(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쓰기도 했다.

1916년 ∼ 1918년 병고의 몸으로 귀국,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국사'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조만식 교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9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사이에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영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 '조선사요령(朝鮮史要領)'·'조선위인전(朝鮮偉人傳)'·'조선역사록(朝鮮歷史錄)' 등 숱한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년 ∼ 1945년 기간에는 연해주의 발해 고적 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大韓歷史)'를 통하여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제말에는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초등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 공산언론에 대항하였다. 같은해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었다.

1947년에는 6촌 동생 장형이 단국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다.[1] 단국대학교 초대학장을 지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봉직하였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당하여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노후에는 서울시사편찬위원·고등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에 사망했으며 그 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가족관계

슬하에 고려합섬(주, 고합그룹 전신)을 설립하였던 장치혁과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낸 장치순이 있다.
  1. 장형은 원래 신익희가 주도하던 국민대학교의 이사장이었으나, 신익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형은 신익희와 결별하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서,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