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include(틀:한국의 역사)] 창해군(滄[* 蒼이라고도 쓴다]海郡)은 B.C 128년 한무제가 설치한 군현이다. >○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等 【集解】惠棟曰, 顏籀云, 南閭者, 薉君之名.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 ○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後漢書 東夷列傳 濊 >○ 원삭 원년 가을, (元朔元年(B.C.128) 秋,) (전략)동이 예군 남려 등이 (東夷薉君南閭等) [복건이 말하길,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 동쪽으로는 대해에 이른다."고 했다. 진작이 말하길, "예(薉, 본문의 글자)는 예(穢)의 옛 글자이다"고 했다. 안사고는 말하길, "남려는 예의 군주 이름이다."고 했다. 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 :「薉, 古穢字.」 師古曰 :「南閭者, 薉君之名.」 ] 구 28만인을 이끌고 항복하므로(口二十八萬人降,), 창해군으로 삼았다.(爲蒼海郡.) >한서 권6 무제기 제6漢書 卷六 武帝紀 第六 >○ 원삭 3년 봄, ((元朔) 三年(B.C.126) 春,) 창해군을 없앴다. (罷蒼海郡.) …… >한서 권6 무제기 제6漢書 卷六 武帝紀 第六 위의 인용문에서 본 것처럼 예군 남려가 [[고조선]]을 배신하고 28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다. [[한무제]]는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고조선의 일부를 영토화하려 하였던 것. 하지만 2년 만에 폐지된 것을 보면 정상적인 작동이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와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를 보면, 팽오(彭吳)라는 고인(賈人:상인) --[[고인]] 故人이 아니다.--이 예맥(濊貊) 조선(朝鮮)에 창해군을 설치하였고, 이를 운영·유지하기 위한 물자 및 인력 징발로 인해 인접한 연(燕)과 제(齊) 지방이 피폐해졌다 기록하고 있다. [* 이때의 연과 제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 성]], [[랴오닝 성]], [[산둥 성]]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길까지 교통로를 정비할 것 [* 한무제가 서남이(西南夷) 정벌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나 만주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이다]을 팽오에게 명하였지만 당시 공손홍의 건의로 무산된다. [* 인력과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창해군은 2년 만에 폐지되지만 [[나비효과|이 여파는 대단하여]] [[왕검성 전투|고조선은...]] --[[망했어요]]-- 한편 창해군이 있던 자리에 [[현도군]]이 설치되니 [[XXX는 죽었어 이젠 없어|이것은...]] --현도군:창해군은 죽었어 이제 없어 하지만 내 마음에 하나 되어 살아가-- 사기 [[장량(전한)|유후]]세가에 나오는 [[창해 역사]]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설이 있다. [[분류:한사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한국의 역사 (원본 보기) 창해군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