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tablealign=right><#C0C0FF><:> {{{+1 '''평양 철수'''}}} || ||||||<:> 6.25 전쟁의 일부 || ||||||<:> http://thesisaviewtimes.com/data/file/ELECTION2/2049262339_FrR02DeW_EAB5ADEAB5B0ED8F89EC9691ECB2A0EC8898.jpg?width=300[br][* 평양 철수를 상징하는 사진...이건만 어째서인지 [[한강]]에서 찍혔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평양 철수일인 [[1950년]] [[12월 4일]]에 [[대동강]]에서 찍힌 사진이다.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Max Desfor)는 이 사진으로 1951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 ||||||<:><#C0C0FF> '''날짜''' || ||||||<:> [[1950년]] [[12월 2일]] [* 제2차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국제 연합군이 평양에서 철수한 일이다.] ~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맨 마지막으로 평양을 철수한 날짜이다.] || ||||||<:><#C0C0FF> '''장소''' || ||||||<:> 평양시 || ||||||<:><#C0C0FF> '''이유''' || ||||||<:> [[제2차 청천강 전투]]에서 국제 연합군이 중공군에 패배 || ||<:><#C0C0FF> '''교전국'''||<^|1> [[파일:국기/대한민국.jpg|width=23]] [[대한민국]][br] [[파일:국기/미국.jpg|width=23]] [[미국]][br]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6/Flag_of_the_United_Nations_%281945-1947%29.svg/450px-Flag_of_the_United_Nations_%281945-1947%29.svg.png?width=23 [[유엔]] || [[파일:국기/북한.jpg|width=23]]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br] [[파일:국기/중국.jpg|width=23]] [[중국|중화인민공화국]] || ||<:><#C0C0FF> '''지휘관''' ||<^|1> [[파일:국기/대한민국.jpg|width=23]] [[백선엽]][br][[파일:국기/대한민국.jpg|width=23]] [[유재흥]][br][[파일:Flag_of_the_United_States.png|width=23]] [[더글라스 맥아더]][br][[파일:국기/미국.jpg|width=23]] [[월튼 워커]] ||<^|1> [[파일:국기/북한.jpg|width=23]] [[김일성]][br] [[파일:국기/북한.jpg|width=23]] [[최용건]] [[파일:국기/중국.jpg|width=23]] [[펑더화이]][br] [[파일:국기/중국.jpg|width=23]] [[한시안추]] || ||||||<:><#C0C0FF> '''결과'''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 수복 || ||||||<:><#C0C0FF> '''영향''' || |||||| 중공군이 38선을 향해 진격해 오면서 전쟁이 원점으로 회귀함. || ||<#C0C0FF><:> '''병력''' || ? || ? || ||<#C0C0FF><:> '''피해규모''' || 청천강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 || 불명 || [목차] '''[[흥남 철수]], [[1.4 후퇴]]와 함께 [[6.25 전쟁]]의 이산가족들이 생겨나게 만든 철수작전.''' == 개요 == [[평양 전투#s-4|평양을 점령]]했던 [[대한민국 국군|한국군]]과 [[주한UN군|유엔군]]이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 짐에 따라 [[북한]]의 수도 [[평양직할시|평양]]에서 철수한 사건. ==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 https://ncache.ilbe.com/files/attach/new/20130310/377678/199827560/925495010/0ada469b32109d57f0b5e9ab725b3055.jpg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확실히 되돌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과 [[10월 7일]]에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명으로 평양에서 철수하고,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했다. [[10월 10일]]에는 동해안 최대 요충지인 [[원산]]을 점령하였다. 김일성은 10월 12일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덕천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치열한 북진경쟁을 벌이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백선엽]]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1사단은 [[10월 9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를 출발하여 열흘에 걸친 북진 과정에서 북한군의 저항을 모두 물리치고 마침내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하였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은 이미 평양을 버리고 후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 저항없이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평양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군을 환영하였다. 그리고 이날 평양 시내에서는 [[인공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렸다. == 평양 점령 중 통치 == [[평양 전투#s-4|평양 전투]] 이후 평양시는 역사적 정통성과 [[대한민국]] 헌법상 당연히 대한민국 영토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유엔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평양을 실효지배를 한적이 없고 대한민국 국군 역시 유엔군 소속이므로 대한민국이 단독으로 통치하는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 사이에 평양의 통치권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결국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유엔이 [[10월 21일]]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국제연합군이 평양을 통치하였다. ~~분단이 되더라도 딱 여기까지 점령하면 최고로 좋았을 텐데... 그럼 [[평양]]은 제2의 [[부산]]이 되는 거고 [[북한]]의 수도는 깡촌 중의 깡촌인 [[강계]]가 된다.~~ == 중공군의 공세 == === [[온정리 전투]](1950.10.25.~1950.10.30.)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6/Map_Chinese_intervention.jpg [[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Onjong#|출처]]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10월 19일]]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30개 사단과 38만 명의 대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깊숙히 잡입해 들어왔었다. [[10월 25일]], 한국군은 평안북도 온정리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당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비로소 중공군이 6.25 전쟁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였다. === [[장진호 전투]](1950.11.26.~1950.11.27.)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b/Chosin.jpg/1920px-Chosin.jpg [[11월 26일]], [[함경남도]] [[장진호]]까지 진격했던 [[미합중국 해병대]]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미합중국 해병대는 전술적으로는 유리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합중국 해병대는 추위와도 맞서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고 철수했다. 이는 미합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참패였다. === [[제1차 청천강 전투]]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6/Map_Chinese_intervention.jpg/440px-Map_Chinese_intervention.jpg === [[제2차 청천강 전투]]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3/Second_Phase_Campaign.jpg 제1차 청천강 전투로 잠시 유리한 전황을 만들었던 유엔군은 11월 26일부터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맞게 되었다. 결국 유엔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평양에서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게 되었다. ===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철수 === http://jihwan00.cafe24.com/g4/data/file/4_1/3717407806_TNL9kjni_1BBE7B4DC2C_C6F2BEE7_C8C4C5F0.jpg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제연합군''' http://jihwan00.cafe24.com/g4/data/file/4_1/3717407806_9x5lwERS_C6F2BEE7_C3B6BCF62C_B1B9B1BA2C_12.04..jpg '''평양에서 철수하는 대한민국 국군''' === 평양 시민들의 수난 === http://kcm.kr/dic_image/addc018c8979d4c8f5f5415466ecdbd1.jpg?width=400 '''자유를 찾아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타고 남으로 피난하는 평양 시민들''' http://jihwan00.cafe24.com/g4/data/file/4_1/990509034_ZIcgYEJ4_12.4_B3B2BACEBFA9B4EB2C_C6F2BEE7_BDC3B9CEB5E9C0C7_C7C7B3ADB1E6_C7E0B7C4.jpg '''평양을 철수하는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을 따라 열차를 타고 피난하는 평양 시민들''' [[1.4 후퇴]] 때 서울 시민들은 피난에 대한 교육을 사전에 받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개전 초기와 달리 미리미리 피난할 수 있었지만 평양 시민들에게는 [[그런 거 없다|그런 거 없었다]]. 12월 2일 ~ 4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을 철수하자, 평양 시민들도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하여 자유를 찾아 함께 남으로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피난 온 사람들의 피난 이유는 대한민국 국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을 피해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피난 과정은 매우 힘겨워서 [[대동강 철교]]를 건널 당시 빠져죽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가족들이 많아서 몸만 피했다가 올 거라고 "곧 갔다 올게.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 라고 말하며 가족들을 평양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면 평양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휴전선]]이 그어지고 철조망이 들어서면서 '''이때의 이별이 평생 이별이 되고 말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 재입성 === http://file2.nocutnews.co.kr/newsroom/image/2014/05/13/20140513105549597926.jpg?width=400 '''평양에 재입성하는 북한군과 중공군''' [[11월 26일]]부터 본격적인 대규모 공세를 펼치던 북한군과 중공군은 [[11월 27일]]에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를 격파하고 평양으로 진군했다. 다만 중공군은 거듭된 전투로 탈진한 상태였고, 북한군은 이제 막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을 시작한 상태였으며, 국제연합군은 평양-원산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신중히 진군하고 있었다. 또 북한군과 중공군은 식량 탈진으로 조심스레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12월 4일에 이미 평양을 빠져나간 뒤였고, 다음날인 [[12월 5일]]에 이를 알아챈 북한군과 중공군은 그제서야 급속 진격에 들어갔다. 평양으로 급속 진격에 돌입한 하루 뒤인 [[12월 6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평양을 잃은지 2개월 15일 만에 평양에 재입성하였다. 이에 따라 평양 시내에는 평양 탈환으로 게양되었던 태극기가 내려가고 인공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 참고자료 - 6.25 전쟁 상황도 == http://www.korea.kr/newsWeb/resources/attaches/2013.06/25/20130625112206727_H0JBLMZI.jpg == 여담 == [[장기려]] 박사도 평양 철수로 생긴 이산가족 중 한 명이다. 평양 철수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장기려 박사 덕에 아군의 부상이 치료되었다며 장기려 박사의 가족도 피난민들의 열차에 태워주겠다고 약속했다. [* 당시 평양 시민들이 피난가는 길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열차를 타는 거 였다.] 그런데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해 온 평양 시민들이 워낙 많아서 장기려 박사의 가족들은 기차에 다 탈 수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평양에 남으려고 했지만 아내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에 재입성하게 될 경우 장기려 박사가 대한민국 국군을 치료해 준 걸 트집잡을 것이라 여겨 둘째 [[장가용]]을 데리고 열차를 타서 남쪽으로 피난했다. 결국 장기려 박사는 [[부모님]]과 아이들, 아내를 평양에 두고 피난 온 셈이었다. 이후 가족들은 평양에서 해주로 가려다가 북한군이 남행 길을 막는 바람에 북에 남게 되었다. [[분류:한국전쟁]] 평양 철수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