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철수 | ||
6.25 전쟁의 일부 | ||
[1] | ||
날짜 | ||
1950년 12월 2일 [2] ~ 12월 4일[3] | ||
장소 | ||
평양시 | ||
이유 | ||
제2차 청천강 전투에서 국제 연합군이 중공군에 패배 | ||
교전국 | 23px 대한민국 23px 미국 유엔 | 23px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px 중화인민공화국 |
지휘관 | 23px 백선엽 23px 유재흥 더글라스 맥아더 23px 월튼 워커 | 23px 김일성 23px 최용건 23px 펑더화이 23px 한시안추 |
결과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 수복 | ||
영향 | ||
중공군이 38선을 향해 진격해 오면서 전쟁이 원점으로 회귀함. | ||
병력 | ? | ? |
피해규모 | 청천강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 | 불명 |
목차
흥남 철수, 1.4 후퇴와 함께 6.25 전쟁의 이산가족들이 생겨나게 만든 철수작전.
1 개요
평양을 점령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 짐에 따라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철수한 사건.
2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확실히 되돌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과 10월 7일에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명으로 평양에서 철수하고,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했다. 10월 10일에는 동해안 최대 요충지인 원산을 점령하였다. 김일성은 10월 12일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덕천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치열한 북진경쟁을 벌이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백선엽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1사단은 10월 9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를 출발하여 열흘에 걸친 북진 과정에서 북한군의 저항을 모두 물리치고 마침내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하였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은 이미 평양을 버리고 후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 저항없이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평양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군을 환영하였다. 그리고 이날 평양 시내에서는 인공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렸다.
3 평양 점령 중 통치
평양 전투 이후 평양시는 역사적 정통성과 대한민국 헌법상 당연히 대한민국 영토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유엔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평양을 실효지배를 한적이 없고 대한민국 국군 역시 유엔군 소속이므로 대한민국이 단독으로 통치하는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 사이에 평양의 통치권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결국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유엔이 10월 21일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국제연합군이 평양을 통치하였다.
분단이 되더라도 딱 여기까지 점령하면 최고로 좋았을 텐데... 그럼 평양은 제2의 부산이 되는 거고 북한의 수도는 깡촌 중의 깡촌인 강계가 된다.
4 중공군의 공세
4.1 온정리 전투(1950.10.25.~1950.10.30.)
출처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10월 19일부터 중공군이 30개 사단과 38만 명의 대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깊숙히 잡입해 들어왔었다. 10월 25일, 한국군은 평안북도 온정리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당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비로소 중공군이 6.25 전쟁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였다.
4.2 장진호 전투(1950.11.26.~1950.11.27.)
11월 26일, 함경남도 장진호까지 진격했던 미합중국 해병대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미합중국 해병대는 전술적으로는 유리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합중국 해병대는 추위와도 맞서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고 철수했다. 이는 미합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참패였다.
4.3 제1차 청천강 전투
4.4 제2차 청천강 전투
제1차 청천강 전투로 잠시 유리한 전황을 만들었던 유엔군은 11월 26일부터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맞게 되었다. 결국 유엔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평양에서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게 되었다.
4.5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철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제연합군
평양에서 철수하는 대한민국 국군
4.6 평양 시민들의 수난
자유를 찾아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타고 남으로 피난하는 평양 시민들
평양을 철수하는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을 따라 열차를 타고 피난하는 평양 시민들
1.4 후퇴 때 서울 시민들은 피난에 대한 교육을 사전에 받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개전 초기와 달리 미리미리 피난할 수 있었지만 평양 시민들에게는 그런 거 없었다.
12월 2일 ~ 4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을 철수하자, 평양 시민들도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하여 자유를 찾아 함께 남으로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피난 온 사람들의 피난 이유는 대한민국 국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을 피해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피난 과정은 매우 힘겨워서 대동강 철교를 건널 당시 빠져죽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가족들이 많아서 몸만 피했다가 올 거라고 "곧 갔다 올게.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 라고 말하며 가족들을 평양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면 평양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휴전선이 그어지고 철조망이 들어서면서 이때의 이별이 평생 이별이 되고 말았다.
4.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 재입성
평양에 재입성하는 북한군과 중공군
11월 26일부터 본격적인 대규모 공세를 펼치던 북한군과 중공군은 11월 27일에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를 격파하고 평양으로 진군했다. 다만 중공군은 거듭된 전투로 탈진한 상태였고, 북한군은 이제 막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을 시작한 상태였으며, 국제연합군은 평양-원산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신중히 진군하고 있었다. 또 북한군과 중공군은 식량 탈진으로 조심스레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12월 4일에 이미 평양을 빠져나간 뒤였고, 다음날인 12월 5일에 이를 알아챈 북한군과 중공군은 그제서야 급속 진격에 들어갔다. 평양으로 급속 진격에 돌입한 하루 뒤인 12월 6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평양을 잃은지 2개월 15일 만에 평양에 재입성하였다. 이에 따라 평양 시내에는 평양 탈환으로 게양되었던 태극기가 내려가고 인공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5 참고자료 - 6.25 전쟁 상황도
6 여담
장기려 박사도 평양 철수로 생긴 이산가족 중 한 명이다. 평양 철수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장기려 박사 덕에 아군의 부상이 치료되었다며 장기려 박사의 가족도 피난민들의 열차에 태워주겠다고 약속했다. [4]
그런데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해 온 평양 시민들이 워낙 많아서 장기려 박사의 가족들은 기차에 다 탈 수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평양에 남으려고 했지만 아내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에 재입성하게 될 경우 장기려 박사가 대한민국 국군을 치료해 준 걸 트집잡을 것이라 여겨 둘째 장가용을 데리고 열차를 타서 남쪽으로 피난했다. 결국 장기려 박사는 부모님과 아이들, 아내를 평양에 두고 피난 온 셈이었다. 이후 가족들은 평양에서 해주로 가려다가 북한군이 남행 길을 막는 바람에 북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