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식

이름강만식(姜晩植)
생년월일1957년 2월 15일
출신지광주광역시
학력광주일고-고려대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해태 타이거즈(1982~1986)
빙그레 이글스(1987~1988)
삼성 라이온즈(198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2번(1989)
정용생(1988)강만식(1989)이태일(1990~1997)

1 소개

전 야구선수.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 이후 빙그레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했다.

광주일고 재학 시절, 1975년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는 광주일고 야구부 전국대회 첫 우승이다. 그 해에 진흥고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또한 광주일고의 유일한 퍼펙트게임 기록이다. 고교 졸업 후 실업팀인 농협 야구단에서 활동하다 고려대에 진학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고려대 졸업 후에 실업팀 롯데에 입단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연고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11승, 1985년에는 13승을 올리며 이상윤과 더불어 해태의 중심투수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연봉조정 때문에 팀에서 골칫덩어리가 됐으며 급기야 1986년에는 4승에 그치자 1987년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첫 해에는 고작 5경기에 등판하여 2승 3패에 그쳤다.
게다가, 성적부진으로 사임한 배성서 감독의 뒤를 이어 1988년 김영덕 감독이 오면서 북일파와 비북일파로 나눠졌는데 이 과정에서 해태 시절처럼 지겨운 연봉조정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인 데 이어 비북일파란 이유로 김 감독의 미움을 사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으나 시즌 후 은퇴했다.

은퇴 후 해태 시절 인연을 맺은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1년부터 쌍방울에서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1992년 시즌 후 신용균 감독이 부임하자 팀을 떠났다.
이후, 1995년 김인식이 OB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1997년까지 투수코치를 했으나 그 해 말 계약만료로 팀을 떠났으며, 현재 광주 충장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는데 1987년 해태를 떠난 뒤 고향 팀에는 더 이상 돌아오지 못했다.

1984년 MBC 청룡의 이원국과 더불어 연봉조정신청을 한 최초의 선수다. 그러나 결국 구단제시액을 받는데 그쳤다. 해태에 있던 시절에는 투수교체하려 나온 김응용 감독의 교체지시에 거부했다가 김응용 감독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다.

2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2해태 타이거즈29144511100.3134.441521169108693711.535
1983229464000.6002.788352255142291.117
198428129⅔114000.7333.26124143676058471.234
198541198⅔
(5위)
13
(5위)
8000.6193.311782244196378731.117
19861972⅔46200.4004.339162552439351.596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7빙그레 이글스52823000.4006.11275112420191.357
198821⅓00000.0000.0000200001.500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9삼성 라이온즈511⅓01000.0007.9415242410101.676
통산(8시즌)151679⅔4137300.5263.7667065213502923402841.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