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시절의 투구 모습.
지금은 마트 사장님!
이름 | 이상윤 |
생년월일 | 1960년 12월 21일 |
출신지 | 광주광역시 |
학력 | 광주일고-한양대 중퇴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1982~1989) |
지도자 경력 |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1990~2000)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2001~200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2004)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2005) |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이자 해태 왕조 초대 에이스. 포지션은 투수였다. 초창기 프로야구의 미남선수로 유명했다. 위력적인 직구 때문에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등번호는 16번.
광주 출신. 광주일고의 에이스로 출발하여 한양대학교 재학 중 프로야구가 창설되자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학창시절에는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 베스트 10에 뽑히기도 했다.
1982년 해태의 원년멤버였으나, 부상때문에 원년에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3년에 다승2위, 20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펼치고 해태 타이거즈의 첫번째 우승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1] 당시 145km/h의 강속구를 던졌는데, 지금이야 대부분의 에이스급 투수는 그 정도 던지지만, 당시에는 최동원이나 선동열을 제외하면 저정도 던지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130km/h 후반을 던지면 강속구 투수라고 일컬어졌으니...[2] 그 다음해에도 10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선수층이 빈약한 팀 사정 때문에 심지어 14완투를 거두며 20승을 일궈냈던 83년 시즌에도 출장 경기수의 거의 1/3 가까이 구원 알바도 병행해야 했다. 80년대 에이스 투수의 숙명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최동원급 괴수가 아닌 이상 2년 간 440이닝을 던지며 전천후로 등판하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1985년에는 부상으로 거의 쉬다시피 했으며 그의 에이스 자리는 선동열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도 1986년 다시 10승을 넘어서며 해태 타이거즈의 두번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1988년 16승을 거두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부상[3]때문에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KBO 리그 통산 8시즌 175경기 843.2이닝 65승 46패 14세이브 33완투 6완봉 3.13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복싱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김기수의 사위였다.[4] 당시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같은 실향민 출신으로서 광주에 정착했던 김기수와 친했고 함께 술을 자주 마셨으나, 선수단에서 "누군 장인 잘 둬서 맨날 주전이네.."라는 소문이 돌자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5]
이후 해태 타이거즈와 선동열 감독 하의 삼성 라이온즈에서 각각 투수코치를 했다. 해태가 KIA로 바뀐 2002년에는 그 전 3년간 타팀의 샌드백이 되며 5점대를 찍는 막장 투수진을 수습.. 3점대로 복구시키면서 2위로 5년만의 가을야구 잔치에 참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6] 야구선수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골프에도 능해서 몇 년간 중국 옌타이에서 골프장 사업을 했고, 이후 귀국하여 2011년부터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에서 지역 프랜차이즈 마트인 '영암마트' 운남점 사장이 됐다고 한다.- ↑ 그러나 당시 삼미의
너구리장명부가 30승을 거두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세우는 바람에 이 기록의 빛이 바랜다. - ↑ 그러나 최동원은 원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출전하지 못했고, 다음 해에 프로에 진출했으나 그 해에는 이상윤 만한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선동열은 아직 고려대 재학중이었다.
- ↑ 두말 할 필요 없이 오 마이숄더!를 외쳐야만 했다!
- ↑ 그러나 후에 딸과 이혼함.
- ↑ 김응용은 선수단의 단합과 공정함을 제일로 쳤고, 그래서 뜬소문이 돌아서 선수단의 분위기가 나빠질까봐 친구조차 멀리한 것이다. 괜히 김응용이 명장소리를 듣는게 아니다.
- ↑ 물론 거기에는 마크 키퍼, 다니엘 리오스의 원투 펀치의 공이 제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