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貴玉
1 생애
1963년 1월 9일 (음력) 대구 의성에서 태어났다. 1981년 서울 명성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85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95년 사법연수원 제24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고, 1995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하였다.
1998년 8월에 수원지방법원 판사, 2002년 2월에 서울지방법원 판사, 2004년 2월에 서울가정법원 판사를 거쳤으며, 2006년 2월에는 서울고등법원 판사가 되었다.
2010년 2월에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가 되었다.
2015년 2월부터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중이다.
2 일화
서울 가정법원 부장판사로 일하던 시절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겨 수많은 네티즌들을 울렸다. 네티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일화를 그대로 옮겨보면:
지난달 초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소년법정.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양(16)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47) 부장판
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거운 보호 처분을 예상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나자 김 부장판사가 다시 말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 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다.
김 부장판사는 "내 말을 크게 따라 하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큰 목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법정에 있던 A양 어머니도 함께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실무관·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빨개졌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不)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A양은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A양은 당시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에서 겉돌았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눈시울이 붉어진 김 부장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A양을 법대(法臺) 앞으로 불러세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
이 재판은 비공개로 열렸지만 서울가정법원 내에서 화제가 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위의 재판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네티즌들은 폭풍감동의 회오리에 빠져들고 있으며,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법조인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김귀옥 부장판사님 같은 분을 보며 우리 사법부에 희망을 봅니다.”
"법이 살아 있다는 걸 몸소 알려주신 분이군요."
"정확한 잣대를 대는 법보다 판사 마음속의 깊은 배려로 딱딱한 법조항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함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사회는 살만한 사회인 것 같네요."
"명판결 중의 명판결입니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