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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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50?)

한국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죽산 조봉암의 부인이기도 하다.

1904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300석지기 부자였던 덕분에 서울로 올라가 학교를 다니던중 3.1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죽산 조봉암을 만나게 된다. 조봉암을 통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후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 유학해 2년간 공부한 후에 귀국했다.

귀국후인 1925년 1월에 "경성녀자청년동맹"이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했는데 겉으로는 여성단체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여성들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25년 4월에 소위 적기시위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왔고 12월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지자 일경을 피해 조봉암과 함께 만주로 피신했다.

1932년, 김조이는 국제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의 동기 5명과 함께 몰래 국내에 잠입, 함경도 함흥에서 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을 재결성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1934년 8월에 노동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당시에 이를 "함남공청사건(함경남도 공산청년 사건)"이라 칭했다.

이 사건으로 김조이는 상당한 옥고를 치뤄야 했는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감옥이 대단히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이었다는걸 감안한다면 여성의 몸으로 3년간 옥살이를 했다는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1937년 9월 20일에 출소했으며 이 당시 조봉암은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후 1938년 12월 6일에 출소했다. 김조이는 조봉암과 결혼하여 인천에 정착한뒤 일제 말기를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김조이는 조봉암과 결혼한 뒤에는 직접적인 활동은 자제하고 조봉암을 조용히 내조하는데만 전념했던것으로 보인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조봉암은 서울에 남아서 넘어가서는 안되는 기밀문서를 파기한뒤에 미처 파기못한 기밀문서는 싸들고 아슬아슬하게 한강을 건너 도피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처 부인 김조이는 데리고 오지 못해 김조이는 그대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이후 김조이의 행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7월쯤에 납북되었다고 하며 이때 김조이의 남동생인 김학송도 함께 납북되었다고 한다. 납북된 이후의 생사여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김조이를 납북한 후에 처형했거나 납북과정에서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평양의 애국열사묘역에 진보당 사건으로 사법살인 당한 조봉암의 가묘를 조성해 기리고는 있으나 조봉암의 부인인 김조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 학자들은 북한이 김조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태도로 볼때 조봉암을 잡지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김일성이 김조이를 처형했고 이후 이를 숨기기 위해 김조이를 없는 사람 취급했을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죽산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한데다 자신도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고 납북당해 행방이 묘연해진 탓에 김조이는 역사속에 묻혀있다가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