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鍾彬)
대한민국 제34대 검찰총장
재임기간: 2005년 4월 4일 ~ 2005년 10월 17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하여 보육원에 맡겨진 적도 있었다. 중학시절 학생기록부에 “…보육원에 있기 때문에 약간 기가 없는 것 같으나, 교과 면이 탁월하게 좋으며 뛰어남”, “침착하고 착실하며 통솔력이 있으며 매사 좋으나 환경이 좋지 못함”이란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을 나와 여수 시내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3년 내내 가정교사로 일하면서도 고교시절 늘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1967년 대학입시에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려 했다. 그러자 고등학교 은사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렇게 대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등록금 모금에 나섰는데,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신문에 실릴 만큼 화제를 모았고, 결국 김종빈은 지역민들이 모아준 십시일반의 성금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고대법대 재학시절에도 계속 가정교사를 하는 등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1] 그러다가 1973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78년부터 27년간 검찰에 몸담아 오면서 기획과 수사 분야의 전문가라는 평을 들었다. 1990년 수원지검 강력부장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유전자 감식 기법을 국내 최초로 수사에 도입하였다.
대검 중수부장 재직중 공적자금 비리 합동수사반을 무난하게 지휘했다.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홍업씨 등을 구속하며 동교동계 비리를 밝혀내는 수사를 지휘해 이름을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맡아 검찰 선배인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을 소환 조사하며 ‘칼날 검사’의 위용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정치권의 온갖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홍업씨를 구속기소하는 등 원칙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호남 출신이라는 데 기대를 걸었던 민주당 동교동계로부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원성을 들었다. 급기야 곧 좌천될 것이라는 소문이 검찰 안팎에서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계속해서 검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2003∼2004년 대검 차장 시절에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맡았는데, 과로로 인해 왼쪽 눈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고생을 했다. 당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자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수사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검찰수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였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에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송두율 교수, 강정구 교수 등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에 대해 불구속수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에 불복하여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하였다.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므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거나 개정하기 전에는 자의적으로 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을 떠난 뒤에는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검찰 내 손꼽히는 바둑애호가로 꼽혔을 정도로 바둑을 좋아한다고 한다. 슬하에 딸만 셋을 두고 있다.- ↑ 그때 제자로 만난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