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삼

1926~2003
우리나라의 세계여행가. 요즘과 달리 교통이 열악했던 옛날에 세계를 누비던 모험가였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실제로 만난적도 있다. (아프리카 편에 나온다.) 저서로는 "김찬삼의 세계 여행"이라는 책이 있다. 각 대륙/지역별로 나누었으며 국배판 이상 대형 판형에 아트지 사진 인쇄, 두터운 하드커버 양장본이어서 가격도 비썼다. 무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여행기이며, 원래는 "세계의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일간 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모은 책이다. 양장본 10권짜리가 완간된 것이 80년대다. 풍부한 사진, 거기에 종종 달리는, 현지의 문화, 역사, 사회에 관한 생생하고 심도있는 내용은 일반인 여행가들의 기행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클럽 활동 인연을 이용해 처음 가본 곳의 현지인과 교류하기도 했다. 사실, 글씨가 작고 한자와 요즘 쓰지 않는 단어도 많으며 므흣한 내용이 조금 끼어 있어서 그렇지 (각국의 해수욕장이라든지, 남태평양의 누드라든지, 아프리카의 나체족 마을 사진이라든지, 정조대 특집이라든지), 몇 년 뒤에 출판된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보다 훨씬 나은그리고 훨씬 더 비싼 책. 다만 2010년대 현재 시점에서 다시 읽어 보면 옛날 사람다운 서술도 보이고, 사실 관계가 틀린 데도 좀 있다. 당시 정보로는 그정도일수 밖에 없었고, 대부분 내용이 사실에 근거해 써 있다.
산업화로 많은 지역 문화와 자연 경관이 사라진 2010년대 현재에는 당시의 현지 문화와 경제상황을 담담히 써내려간 글과 수많은 천연색 사진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므로, 30년 이상 지난 현재에도 김찬삼 여행기의 가치는 퇴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 수급을 말려 만드는 중남미의 장식품, 연기로 시신을 말리는 오세아니아 지역의 미이라 등은 이미 사라진 문화이다. 특히 백인들은 잘 가지도 않는 여러 오지, 험지까지 가서 찍어온, 이미 사라진 경관을 보여주는 천연색 사진은 해당 각 나라에서도 요청할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일단 그의 여행기에 나온 얘기, 사진들은 거의 다 한국 최초 소개이다.

처음엔 고등학교 교사였지만, 나중에는 경희대 교수가 되었고, 은퇴 즈음에는 어린이용 TV 세계여행프로그램 해설도 했다.

화객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오토바이를 타고 북미와 아프리카를 종횡하고..안 가본 데가 거의 없고 사진을 많이 남겼다. [1] 당시에는 냉전 시대고 국력도 형편없던 세계 최 빈국 시절이라 비자가 안 나오는 곳도 많고 1,2차 여행 때엔 일부 공산국가에는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80,90년대에 갔다. 1990년대 초에는 현대자동차 후원을 받아 갤로퍼로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포함해 288일간 세계 여행을 했다. 당시 인도 등지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결국 그 후유증 때문에 별세하였다.

지금도 불안하다 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후진국의 당시 치안상태를 생각하면 목숨걸고 다닌 지역도 많고, 실제로 속아서 따라갔다가 실랑이끝에, 또는 격투하고 빠져나온 무용담도 나온다. 잘 데가 없어서 현지 경찰서를 찾아가 유치장에서 잔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맹수와 만나기도 했다. 노상강도를 만나 싹 털리고 구두 속에 숨겨 둔 필름만 건진 일도 있다. 내국인의 해외 여행이 금지이던 시절에 나갈수 있던 이유는 처음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알바해서 돈을 벌어 갔기 때문이다. 첫 여행을 시작한 50년대 말 당시, 한국의 국력은 전쟁 탓에 모든 게 사라지고 세계에서 가난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빈국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일부 미수교국과 공산권[2]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를 몸으로 때워가며, 재외 공관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전여행을 하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여행 중 굶기를 밥먹듯 하다 보니 먹을 게 있으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한 번에 많이 먹고 또 한참을 버티기도 했다고 하며, 아프리카를 종횡단 두 번 했으면서도 큰 풍토병 걸리지 않고 무사하였으니, 생각하면 강철같은 체력을 가진 분이었다.

공항이 개발되기 한참 전 영종도에 세계여행문화원을 차려서 가지고 온 수많은 자료를 전시하였고, 별세 후 그의 아들 장섭이 관장을 맡아 운영하였으나, 2007년 공항 주변이 개발되며 할린다는 얘기가 나왔고, 2013년 결국 철거되었다. 홈페이지는 살아 있어서 과거 모습을 볼수 있다. [1] 그럼 수많은 귀중한 자료들은? 어찌 될지 모른다. 이게 대한민국 인천시의 문화 수준.

어린 시절 이 분의 여행기를 읽고 여행가가 된 사람도 많다.

지금 배낭여행자, 바이크 여행자들의 선구자 세대가 되는 분이다.
  1. 일부 직접 찍지 않은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임에도 그런 사진에는 꼭 "이 사진은 외국 잡지에서"라는 캡션을 달기도 했다.
  2. 왜 일부냐 하면, 내세우지는 않지만 실제로 공산주의국가로 분류되었거나 국교가 없는데도 우격다짐으로 국경에서 임시 여행 비자나 통과 비자를 받아서 들어간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엔 공산국가를 허가 없이 방문했다 국내 돌아오면 여지없이 간첩 취급, 안기부행이었다. 한국 정보기관도 해외 정보가 어두워서 그냥 넘어가던 거였지, 정말 무모한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