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 195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51 - 레옹 주오알베르트 슈바이처1953 - 조지 C.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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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지닌다.

1 개요

밀림의 성자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 봉사활동으로 유명한 의사이자 종교 철학자이자 음악가이자 목사. 노벨평화상 수상자. 종교개신교이다.

2 일생

2.1 출생과 성장

프랑스독일 접경지역인 알자스-로렌[1]에서 태어났으며 이 덕에 그는 독일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위인전의 영향 때문에 흔히 부유한 목사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사실 슈바이처의 부친은 오히려 가톨릭교인이 많은 알자스-로렌에서 소수인 개신교 목사였고, 부양가족이 많아 살림이 빠듯했다고 나온다. 고등학교도 아버지가 아닌 자식이 없는 작은할아버지 내외분의 돌보심 덕에 다녔다.

1899년 24살 때 철학 박사, 이듬해 복음서 연구로써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의사로서의 업적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20세기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매우 독실한 개신교인이었고, 개신교 신학 연구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당시의 보수주의 교단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그를 매도하려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적 예수의 방법론을 따라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한 논문과, 사도 바울에 대한 논문은 고전에 속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190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신학부 대학 강사로 근무하며 성 스테판 루터교회 부목사로서의 목회도 병행했다.

그 이외에도 신학연구 및 음악가 바흐에 대한 연구, 그리고 오르간 연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특히 바흐에 관한 저서를 발표하는가 하면, 파이프 오르간의 제작과 연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음악을 향한 열정이 상당했는지, 훗날 아프리카에도 피아노[2]를 가져가고, 포로 수용소에서도 판자를 건반 삼아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점차 사라져가는 유럽 각지의 구형 파이프 오르간의 보존에도 열심이어서, 나중에는 "저 양반은 아프리카에서는 늙은 흑인들을 살리더니, 유럽에서는 낡은 파이프 오르간을 살리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2.2 오강가의 탄생

하지만 그는 21살의 대학생 시절부터 간직해온 이 있었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그 이후에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을 가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의학과정에 입학하여 7년 동안 공부를 해서 37세인 1912년에 의학 박사가 되었다. 대학 강사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그의 통보에 깜짝 지인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지만,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1898년에 귄스바흐에서 있었던 개인적 결단 이래로 충분히 심사숙고한 결과라며 차분하게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부인도 뜻을 같이 하여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이듬해 38살 때 부인과 함께 적도 아프리카의 람바레네[3]로 건너가 현지 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봉사에 나섰다.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해서 당시 원주민들은 슈바이처를 '오강가'(마법사)로 칭송했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곳에 본래 거주하고 있는 흑인 원주민들을 백인에 비해서 저급한 인간, 뒤떨어지는 '인종'으로 멸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독교인들이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네 이웃'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신학연구서를 집필하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그런 위선적인 유럽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누구보다 충실하고자 했던 셈이다.

2.3 세계대전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억류된다. 람바레네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독일 국적인 그는 자연스럽게 적국 국민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의 사상인 생명 외경의 윤리는 이 시기에 다듬어지게 된다. '인간이란 살려고 하는 생명, 또한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실천 윤리학의 창안이 그의 목표였다고 한다. 그리고 1917년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어머니가 프랑스 병사들의 에 깔려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죽음도 의료 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강연과 연주회 및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출판으로 다시금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는데 열을 쏟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알자스가 프랑스로 편입되어 국적을 프랑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자, 그는 람바레네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고생을 했지만, 연합군도 추축군도 그의 병원을 보호하려고 했으므로 무사했다.

1924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1928년에는 괴테상을 수상하였다. 이때부터는 슈바이처를 존경하는 다른 의사들도 아프리카로 건너와 병원 규모를 더 늘릴 수 있었다.

"아프리카 봉사에 한정한" 대표 저서로는 '나의 생애와 사상',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람바레네 통신'이 있다. 읽어보면 꽤 재미있고 아주 솔직한 부분들이 많다. 일독을 권한다. 그 외 사후 서한집이 국문으로 출판됐고, 철학서로는 "문화와 윤리"도 번역된 적 있다.

2.4 노벨평화상 수상

그는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수상자가 결정될 때마다 늘 논란이 잦았던 노벨평화상이지만, 그가 수상자로 결정되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평화상 자체는 받아들였으나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시상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슈바이처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에 직접 참석을 했으며, 수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오슬로 라디오 방송국에서 원자력 개발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강연을 하였다.

여담으로 이 노벨상으로 획득한 상금은 역시나 아프리카에서 나환자촌을 만드는데 썼다고 한다. 그 외에도 병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모금 운동과 연주회, 출판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인배

2.5 죽음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는 독립하여 가봉 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어, 새로 창설된 적도성십자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부인이 사망한 이후부터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머물며 평생동안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965년에 그는 90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고, 평생을 바친 병원 옆의 무덤에 묻혔으며 여기에는 간호사로서 평생 그와 함께 일했던 그의 부인도 잠들어 있다. 더불어 딸인 레나 슈바이처 밀러(1918~2008)도 아버지 뜻을 이어받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살다가 사망했다.

3 그의 사상

그의 자서전은 유명한데, 어린 시절부터 그가 공부하던 시기,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봉사 등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며 그의 사상을 함축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생명 외경의 윤리는 우주적으로 확대된 사랑의 윤리이다. 그것은 예수의 윤리를 논리적으로 추구하면 당연히 이르게 되는 그런 윤리이기도 하다.
  • 만일 인간이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참으로 깊이 생각한다면, 그리고 세계에 가득한 생명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자신의 생명과 그 주위의 모든 생명에 경외를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나의 삶 속에도 때때로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심하게 닥쳐온다. 어쩌면 좌절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부과된 책임과 피로의 짐을 감당해 나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 나의 가족들에게 바치고 싶은 시간도 거의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축복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자비를 베푸는 일에 몸 바칠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랑과 친절을 경험했다.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주는 많은 분들도 만났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기꺼이 나를 바치고자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그지없는 축복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량 살상의 비극도, 슈바이처 박사의 삶과 사상이 특히 유럽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 더 나아가 생명 자체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현실 속에서, 슈바이처 박사의 삶과 생각은 신선한 충격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4 그에 대한 평가

의료인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인류애와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장 잘 실현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현재는 의료봉사자들의 사랑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헌신적인 의사의 대명사격으로 존경받고 있다. 살아 생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아프리카의 많은 흑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다 간 그는 지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 중에서 계란에서 뼈다귀를 찾아내야 직성을 풀리는 자들이 기록을 열심히 뒤진 후에 슈바이처를 "자비로운 독재자"였다고 묘사한 경우가 있다. 이들 비판의 주된 요지는 슈바이처는 랑베르네의 병원을 일부러 열악하고 형편없어 보이도록 방치했고 실제 시설은 그많은 기부금은 어디로 갔나 싶을 수준이었다 하며, 슈바이처가 환자들을 고압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4] [5]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런 비판은 억지스러운 비난, 지나친 흠 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우선 기부금이 병원 시설을 발전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것은 오로지 그들만의 생각이다. 21세기의 지금까지도, 수천개의 기부단체들과 적십자사, 국경없는 의사회 등이 전세계를 누비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고 있고 전세계에서 수억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막대한 기부금을 지원하고 있음에도 아프리카의 의료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다큐 같은데만 봐도 알겠지만 허름한 오두막에 간이용 침대 여러 개와 약 보관용 냉장고 하나만 덜렁 둔 채로 운영되는 병원이 태반인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의약품과 의료도구 마련하는 비용은 물론, 그걸 현지까지 옮기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6] 하물며 의료 봉사단도 몇 개 없고 오늘날처럼 전세계구급 기부 단체들도 없이 일부 인사들의 기부금에만 의존해야 했던 슈바이처 박사의 병원은 어땠을까? 당시에는 의료 봉사와 기부금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거니와, 세계 대전대공황으로 전세계에 경제적 위기가 닥쳐 사람들이 기부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시대였다. 실제로 슈바이처가 수용소에서 나온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직접 강연을 다니며 의료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신이 번 돈으로 충당해야 했다.

슈바이처가 병원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도 어불성설로, 그는 모금운동과 강연을 다니며 병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노벨상 상금부터 자신의 사적 재산까지 모든 돈을 털어넣을 정도로 병원과 환자들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슈바이처가 이 기부금 중 단 몇 푼이라도 빼돌려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그 시대에 수용소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생명과 모든 재산을 바쳐 아프리카에 헌신한 슈바이처 입장에서는 기부금 몇 푼 덜렁 투척하고 실제 의료환경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해본적 없으면서 왜 병원 시설이 이 모양이고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의료 시스템이 유럽만 못한 거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위선자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병원 시설에 대해선 슈바이처가 의도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의료봉사자들은 하얀 가운과 근현대식 건물로 전형적인 유럽식 병원을 구축하자고 한 반면 오로지 슈바이처만이 원주민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가족까지 모두 데려와서 치료받고 가족들이 편안히 간병할 수 있도록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오두막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7]해 봉사자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근처 연안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다른 백인 의사들은 병원을 일부러 다 낡아빠진 오두막처럼 짓는 슈바이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역겨워하며 그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 백인 의사들의 생각이야말로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이 느꼈을 근현대식 의료 서비스에 대한 거부감을 간과하고 이들의 생활방식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유럽식 건물과 의료 방식을 고스란히 투입하는 것에, 그런것에 대해 원주민들이 느낄 경계심이나 거부감은 고려하지 않고 유럽식 병원이야말로 우월하고 문명적인 것이고 당시 아프리카인들의 생활방식이나 주거지는 미개하고 불결하다고 생각해 이것에 동조하는 슈바이처 박사를 비난하는 것은 사실상 인종주의에 가까운 사상이다. 슈바이처는 문명사회의 의술에 환자들이 느낄 거부감까지 생각하고,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과 헐벗은 옷차림도 이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이라며 받아들이고 최대한 존중하였기에 병원도 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는 모양으로 지었던 것이다. 오히려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까지 갸륵할 만큼 배려한, 오늘날의 의사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처사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이 의료시설의 위생을 철저하게 유지하였고 덕분에 환자들이 몰려들며, 환자들의 가족이 느낄 스트레스나 이질감까지 배려한 결과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독재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우선 의사라는 직책에 대한 이해와 정상참작이 필수인데, 오늘날 현대화된 사회의 학식있는 환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의사들은 다소 권위적인 태도를 취해 이런 의사들까지도 "니들이 뭐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냐? 의사 직함 달면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본인의 상태에 대한 위기감이나 자각이 없는 환자들의 경우 고압적으로 대해서라도 반드시 수술이나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의사의 또다른 임무이고 특히 1초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응급실에서는 이런 태도가 더더욱 강화된다. 하물며 응급실보다 더한 한센병과 전염병이 창궐중인, 즉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 같은 열악하고 급박한 환경에서, 의료지식은커녕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병이 낫는다'라는 것조차 의구심을 품고 거부감을 느끼는 원주민들을 상대해야 했던 슈바이처는 어땠을까? 정말로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게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5년에도 에볼라 바이러스를 치료하려는 의사들에 대해 주술만이 치료법이라고 하며 의사들을 피해다니는 원주민들이 많은데, 의료봉사가 거의 없었던 당시 원주민들이 의사와 의료 서비스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협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사소통도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근현대의 의술을 거부하고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것도 인지 못하며 저주받았다고만 생각하는, 문명에 무지한 환자를 상대로 무조건 설득만 하라는 것은 지나친 억지 혹은 불가능을 강요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슈바이처는 병원을 반대에 부딪혀가면서까지도 최대한 환자에게 친근한 환경으로 조성하고, 때로는 윽박질러 가면서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수용소에 갇혀도, 노벨상을 받아도, 아내가 죽어도 그는 삶의 희노애락을 겪으면서도 결국에는 언제나 랑베르네 병원으로 돌아갔고 끝내 거기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단순 몇차례 기부로 퉁치거나 기독교 선교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입성한 위선적인 백인 봉사자들과 다르게 그의 병원은 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목적에만 충실했으며 그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 모든 것을 투자하여 병원을 지켰다. 이런 그의 노력을 위선이라 폄하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슈바이처는 되려 그 시대 사람으로선 보기 드물게 아프리카 환자들을 존중하고 헌신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마지막까지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위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의사였다는 것이다.

4.1 장 폴 사르트르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슈바이처는 장 폴 사르트르의 외당숙, 즉 오촌 관계다.[8] 사르트르의 회상에 의하면 사르트르의 외조부 샤를 슈바이처(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는 그리 좋은 외조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애들과 못 어울리게 집에 가두고 자기 말만 들으라 했기 때문. 또 어른이 된 후의 사르트르의 행적을 보면... 기독교에 학을 뗄 만했다.

5 트리비아

세계여행가 고 김찬삼 선생이 실제로 만나뵌적이 있다고 한다. "우물은 한 우물만 물이 나올 때까지 파라"라는 격언과 격려를 받았다고.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아프리카편에 람바레네 병원을 방문해 같이 찍은 사진이 나오고, 나중에 유럽편에서는 말년에 슈바이처의 비서였던 할머니가 관리하는 건물을 방문해 유물을 살펴보고 고인을 기린 얘기가 나온다.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 지 느껴지는 부분, 수정바람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친분이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말년에 중국, 일본에 방문했다가 아시아 독감에 걸렸는데, 상태가 잠시 호전되자 슈바이처가 찾아와 금방 나을 거라고 했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잔차키스는 독감으로 사망한다.[9]
  1. 1875년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로 독일이 이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슈바이처의 출생 당시 국적은 일단 독일이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 후에 알자스-로렌 지역이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자 의료활동하기 편한 프랑스로 국적을 바꿨으므로 사망 당시 국적은 프랑스이다. 슈바이처 자신은 특별히 프랑스나 독일의 민족 의식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슈바이처 본인이 꿈을 꿀 때 독일어로 꾼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 람바레네에서 기반을 잡은 뒤에, 유럽의 바흐 협회에서 그에게 열대에서 쓸 수 있는 피아노를 선물했다. 파이프 오르간 연습을 할 수 있는 것으로.
  3. 현재의 가봉 공화국 지역이다.
  4. '독재자'란 평은 악의적인 표현인데, 그 말이 나왔을 이야기는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살인하고, 악습과 주술에 매여 생명을 잃고, 알콜중독에 시시한 유럽산 장난감과 사치재를 사는 데 일 년 수입을 탕진하고, 도움을 주는 병원에 해꼬지를, 계약을 편의대로 어기며 더러는 위협하는 사람들을 매번 웃으며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5. 환자를 강압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야기 역시 몰이해에서 기반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의사-환자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큰 원인이지만 당시 슈바이쳐가 처한 환경도 선진국에서 진료 하듯이 환자에게 이해를 구하는 식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6. 그리고 경로 중간의 방해자들을 뚫고 가야하는 위험성도 있다. 현대에도 (반대파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구호 물자인줄 알면서도 공격해 인력과 물자를 모두 수포로 만드는 정부도 있다.
  7. 물론 가능하면 천장까지 모기장을 치고, 벌레와 습기를 막고, 열기를 빼내는 등 조치는 다 했다. 안 그러면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을 못 막으니까. 애초에 환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환자 가족의 노동력을 지휘해 현지에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병동을 지어갔다. 곡물과 저장식품도 수입하고, 시멘트조차 생산되지 않는 곳이고 직물과 유리병과 깡통도 귀하고, 가공한 나무판자도 식민지 백인들의 호의로 얻어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자금과 지인을 통한 모금, 출판인세는 유럽에서 붕대와 약품을 사보내는 데 전액 사용.
  8. 사르트르의 모친은 Anne-Marie Schweitzer(1882~1969) 인데 이 곳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외조부, 즉)Her father, Charles Schweitzer, 1844-1935, was the older brother of Albert Schweitzer’s father, Louis Theophile, 1846-1925 이다.
  9. 출처는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