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도 전투 | ||
날짜 | ||
1598년 음력 11월 21일 ~ 24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부산 다대포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무의공 이순신 조효열 송희립 김완 우치적 나대용 이완 손문욱 진린 유정 | 불명 |
병력 | 불명 | 소 요시토시 휘하 1천여 명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결과 | ||
남해안의 일본군 소탕, 임진왜란 종전. |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로 노량해전의 후일담으로 이루어진 소탕 작전이다.
노량 해전의 패배 소식을 들은 소 요시토시가 병사를 이끌고 남해도를 떠났으며, 시마즈군의 부장인 키이레 세주노카미, 카바야마 쿠다카 등은 노량에서 패배하자 도주해 남해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요시토시가 버리고 간 성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창선도로 향했으며,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남해도에서 요시토시 휘하의 1천여 명을 죽였다. 조선, 명 연합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배를 모두 불태우고 포구를 봉쇄했으며, 진린이 11월 21일 낮에 성을 수색했지만 적의 배는 텅 비었고 성 위에 불빛이 있었지만 곧 꺼졌다고 하며, 새벽녘에 적들이 밤 사이에 뒷산으로 도망쳤고 일본군은 수 만 석이 되는 곡식, 총포, 화약, 소, 말 등의 가축을 놓고 갔다고 한다.
진린은 수급을 얻기 위해 급급하면서도 방옥을 불태우게 해 3천여 석의 양곡이 소실되었으며, 유정도 24일에 도착해 일본군이 남긴 수급을 찾는 것에 몰두하다가 조선 사람 중에 일본군에게 잡혔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있던 사람들을 찾아내 모조리 목을 베면서 고니시가 보낸 적의 인질 6명의 목도 베었다. 또한 진린이 남해도에서 불을 질러 일본군 뿐만 아니라 남해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손문욱이 이 상황을 보고해 진린이 중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