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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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전투 목록
왜교성 전투
(1598년 9월 20일)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정유재란 종료
이순신 전사

파일:Attachment/death of admiral yi.jpg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도.

此讎若除 死即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해전 직전 이순신의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이항복의 백사집에 기록된 이순신의 맹세

죽은 이순신이 산 왜적을 깨뜨렸다(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기사

노량 해전(1598년 11월)

세상의 끝에 선 투쟁
스스로 피흘려 부르는 희망
불멸의 승리를 향해
오라,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예고1, KBS

7년 전쟁의 끝

노량해전
이겨서 지켜내리라
내 칼의 마지막 울음
칼날 사이로 열리는 세상
불멸의 역사가 온다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예고2, KBS

임진, 정유재란 최대의 해전이자, 최후의 조직적인 전투

노량 해전
날짜
1598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장소
조선 노량 앞바다[1]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
명 제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충무공 이순신
진린
등자룡
이영남
조효열
무의공 이순신
송희립
우치적
나대용
이언량
이완
고득장†
방덕룡†
손문욱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마사시게
다카하시 무네마스
오코히라 다카시게†[2]
마치다 히사마사†[3]
이케베 사다마사†[4]
병력조선군 전선 83척
명나라군 전선 63척
전선 500여 척
피해 규모이순신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500여 명 사상
전선 200여 척 침몰
100여 척 연합 수군에게 나포
150여 척 파손
사상자 5천 내외
결과조명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일본 구원군 궤멸, 고니시 유키나가의 탈출[5]

1 전투 이전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왜군을 격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왜군은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진격해서 한양을 공격한다는 수륙병진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군은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가로막혔고, 육군은 직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가로막힌 탓이었다.

왜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진행할 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왜군은 남해안에 [6]을 쌓고 되려 수비에 치중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의 왜군들의 몰골이 정말 처참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기가 그 동안 타고 다니던 말을 도축해서 그걸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였다.

이순신 또한 도원수 권율, 명 수군도독 진린, 육군제독 유정 등과 함께 수륙 합동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다. 목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7] 그러나 6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왜교성의 함락에는 실패했다. 나라 육군이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인 탓이었다.[8] 결국 이순신은 고금도로 물러나 고니시의 동태를 감시했다. 일본 수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명(明)군에 제의하는 의미가 담긴 ‘간찰(簡札·한문 편지)’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런 가운데 1598년 8월 18일, 일본군의 총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결국 사망했다.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위임받은 고다이로(五大老)와 고부교(五奉行)들은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의 철수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장기간의 군사활동을 벌이면서 전쟁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던 다이묘들은 알음알음 집결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대 일본군의 퇴각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이순신은 기어코 일본군과 장수들을 죽여서 7년 전란의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이었고, 이순신 휘하 군졸 및 장군들은 임진왜란 당시 온갖 잔학한 짓을 저질렀던 일본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후퇴하는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수장시켜 다시는 힘을 못 쓰게 하자!" VS "돌아가느냐 죽느냐가 오늘에 달렸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의 돌이킬 수도 없는 최후의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2 전투의 전개

이에 이순신은 계책을 써서 왜군을 유인하기로 결심했다. 1598년 11월 18일, 일단의 병력을 순천 왜교성 앞으로 보내 조선 수군이 다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절박해진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9] 그러자 시마즈는 고성에 주둔한 다치바나와 남해에 주둔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군대와 함께 300~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향했다.

<임진전란사>에서 정리한, 노량해전에 참가한 조선군 장수들은 다음과 같다.

조선 측

  • 삼도수군통제영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 전라좌도수영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임)
        • 흥양현감 고득장
        • 낙안군수 방덕룡
        • 조방장 우치적
        • 광양가장 나대용
        • 녹도만호 송여종
        • 발포만호 소계남
        • 사도가장 이언량
        • 회령포만호 민정봉
    • 경상우도수영
      •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立夫)이순신
        • 제포만호 주의수
        • 사량만호 김성옥
        • 안골포만호 우수
        • 영등포만호 정응두
        • 미조항첨사 김응함
        • 당포만호 안이명
        • 보성군수 조계종
        • 조라포만호 정공청
    • 전라우도수영
      •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안위
        • 해남현감 유형
        • 진도군수 선의문
        • 강진현감 송상보
        • 무안현감 남언상
        • 장흥부사 전봉
        • 가리포첨사 이영남
    • 충청수영
      • 충청도 수군절도사 권준은 참가하지 않았다.
        • 당진포만호 조효열

창선도에서 출발한 500척의 전선에 수만 명의 정예 군사를 태운 일본 함대는 서서히 노량해협으로 접근하여 오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은 이미 노량 근처의 섬에 복병을 숨겨놓고 왜군 선단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노량 근처에 진입한 일본 선단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하여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노량 근처에 복병한 삼도수군 복병장의 함대가 기습을 가하자 노량해협을 안전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왜군들은 크게 당황하였으며 수 척의 왜선이 격침되자 그제서야 기습당했다는 것을 안 시마즈는 즉시 우세한 함선의 수를 이용, 조선수군 복병장의 함대를 포위하려 한다.[10]

그러나 이미 죽도 부근에 매복하여 있던 진린 함대가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을 하고 있었다. 원래 명군 전선인 사선, 호선들은 왜군의 전선인 세키부네에 비해서도 전투력 면에서 열세에 있었으나 진린과 등자룡이 탄 배는 판옥선으로 왜선들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고, 등자룡이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일본 함대에 돌격해 들어가자 때에 맞추어 삼도수군 복병장의 함대도 그에 호응하여 왜선을 침몰시키기 시작했다. 삼도수군 복병장 함대의 역할은 왜군을 기습하는 임무 말고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 수군 및 진린을 호위하는 임무 또한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함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하였다.

그리고 관음포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수군 본 함대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함대는 왜 수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하였고, 어린진을 펼친 상태에 있던 왜 수군 함대는 졸지에 앞에서는 명 수군, 우측에서는 조선수군 복병장의 함대, 좌측에서는 이순신의 본함대에 의해 삼면 포위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이 때, 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하여 명 수군과 복병장의 함대에서 불화살과 신기전, 불 붙은 짚섬으로 화공을 가하였으며 순식간에 왜군의 함대는 불타기 시작하였다. 이는 매복 기습 후 삼면 포위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가한다는 이순신의 전술에 왜군 함대가 완전히 말려든 것으로써 이미 왜군의 승기는 사실상 꺾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본함대는 경상우수사 이순신(무의공)을 선봉장으로 하여 돌격하였다. 화공에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중앙을 돌파당하고 만다.

그러나 왜군 지휘관인 시마즈는 과연 사천 왜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명장다운 빠른 판단을 하여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군 함대를 공략하기로 한다. 큰 피해를 입은 왜군 선봉대는 전투불능에 빠진 상황이었으나, 선봉대 뒤에 있는 중위, 후위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은 상황이었다. 왜군 함대는 명군 함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11]하였고, 이 때 등자룡의 판옥선에 명나라 함대의 엉터리 포격술로 인해 불이 났고, 돌진하는 왜군에 의해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이 불타버리고 만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왜 수군은 즉시 진린의 대장선으로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의 함대가 근처에 와서 진린의 함대를 구하였고 조-명 연합수군은 일종의 포위진을 펼친 후 다가오는 왜군 함대에 포격을 하였다. 야간이었기에 평소의 화포 사정거리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때문에 근접전[12]이 벌어졌으나,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던 왜 수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 사기가 낮아졌으리라 짐작된다.

명 수군을 공격하여 중앙을 돌파하여 활로를 뚫는다는 왜군의 계획이 이순신의 빠른 구원으로 인해 무산 된 상황에서, 노량에서 여수방향으로 흐르던 물이 방향을 바꾸어 여수에서 노량 방향으로 일기 시작하자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이 파도를 등에 업은 조명연합함대는 왜 수군을 관음포구 안으로 밀어 붙이면서 관음포 입구에 정렬하여 입구를 철저하게 봉쇄, 포위섬멸을 시작하고 왜군은 거센 저항을 시작한다.

3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오전 8시경,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추격하다가 적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순신이 어디에 탄환을 맞았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엇갈린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가슴을 관통하여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적고 있고, 안방준의 은봉전서에는 '겨드랑이 아래(腋下)'에 맞았다고 적혀 있다. 둘 다 같은 곳 아님? 각종 매체나 위인전 등에서 노량해전을 묘사할 때는 징비록의 기록을 따라 흔히 가슴에 탄환을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탄환에 맞은 이순신은

"戰方急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고 유언을 남겼고, 조명 연합수군은 '이순신의 죽음을 모른 채' 남은 적들을 소탕하며 정오까지 전투가 계속 되었다.

매우 유명한 유언이지만 그래서인지 뒷이야기도 많다. 이순신이 남긴 이 유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그런데 정작 징비록보다 약간 뒤에 초판이 간행된 행록에선 별 얘기가 없다가, 나중에 재간에 재간을 거듭하면서 어느 사이엔가 유언이 첨부되었다. 이에 몇몇 연구자는 해당 유언이 없었거나 다른 내용이었을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

하지만 이순신과 교분이 있었던 이원익인조에게 해당 유언을 그대로 전하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려 있어, 정확히 같은 문구는 아니더라도 이런 유언을 남긴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유언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굉장히 많은데,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적에게'라는 표현은 일언반구도 없다. 애초에 적에게 총사령관의 죽음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 오히려 아군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수병들이 자기 장수가 죽었다는 걸 알면 사기가 극도로 떨어질 테니까.[13]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이 전투 중에 알려지지 않았다곤 하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분전하다가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인물들의 기록도 꽤 나온다. 이순신과 동승한 송희립도 부상을 입었고 유형은 탄환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끝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잔적을 소탕하다 전사했다.

이 노량 해전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당대 사료는 실록에 있는 이덕형의 보고인데 그것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지휘관이 전사한 탓에 확실한 장계가 없기 때문이다.[14] 그래도 그의 보고 덕분에 전투의 전개가 상당히 알려졌지만 정말 자세하게 보고한 충무공의 장계를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특히 장수급이 다수 전사한 건 임진왜란 해전 내 없었던 일인데 이것으로 그 날의 전투가 얼마나 혈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칠천량 해전... 아니 그건 똥별 한 놈의 병크...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보면 조선수군은 부족한 함선과 병력의 규모를 우월한 화력과 사정거리의 우위로 극복하고 있었기에 포격전 위주의 전투를 행해왔다. 하지만 노량 해전의 경우에는 적의 섬멸을 목포로 하였기에 근접전의 양상까지도 띄었기에 이과정에서 이전에 비해 엄청난 사상자가 나오게된다. 그럼에도 아군의 사상자가 적었던 것은 당시로선 깡패(...)수준의 판옥선의 체급 때문. 실제로도 일본 수군은 판옥선까지 접근한다 쳐도 크고 아름다운 판옥선의 상층부까지 올라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의 화살과 승자총통 등의 불세례(...)를 받은 것은 덤이다... 조란탄은 보너스 알파다

결국 접근에는 성공했으나 판옥선 상층부까지 올라가는 것은 어려운 관계로 이렇게 된 이상 조선군 장수를 노린다!는 도박 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량 해전에서 유례없는 조선 수군 장수들의 전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듯 하다.[15][16]

4 전투의 결과

군선 100여 척을 포획했고 200여 척을 분멸하였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셀 수 없다

- 선조실록 권 106 선조 31년 11월 을사. 명나라 보고서

왜군선 200여 척을 격침하고 사상자가 수천 명

- 선조실록 권 106 선조 31년 11월 무신. 좌의정 이덕형이 노량을 둘러보고 올린 보고서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4168) 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300~500여척의 왜군 전선중 살아 돌아간 것은 50여 척. 나머지는 모두 격침 또는 전투불능 상태가 되거나 조명연합수군에 나포되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전사자가 많은데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순신을 비롯,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잔적 추격전 가운데 왜군의 총탄에 사망했다.
선조 106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27일(무신) 5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18세기 말에 작성된 호남의절록에 이순신의 동순참좌제공(함께 싸우거나 전사한 선비들)은 144명이고 동순제공(함께 전사한 선비들)이 58명인데 그중 21명, 약 38%가 노량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또 다른 당초의 목표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및 왜군 장수들을 잡는 일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고니시는 노량 해전의 혼란을 틈타 부산으로 도망쳐서 일본으로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물론 이는 이순신의 책임이 아니라 기민하게 도망친(...) 일본 장군들이랑 뇌물을 받고 고니시의 퇴각을 용인해준 진린의 책임이 크지만.[17]

선봉이자 주력군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사천왜성에 주둔한 시마즈군은 기록에 따라 7~8천에서 1만까지 나오는데 보통 7천으로 추정한다. 선두를 맡았기에 피해가 매우 컸으며 휘하 부장의 함대와 단절, 이들은 남해도에 상륙했고 시마즈 본대는 그대로 해협을 돌파, 이름 있는 무사계급만 26명이 전사했고 그 외 다수가 전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탄 대선이 큰 피해를 입어 다른 선박에 구해져서 작은 배로 옮겨타서 탈출했다.[18] 또한 시마즈 소속의 군선은 121척으로 기록돼 있다.그 외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병력 오천여와[19] 기타 다이묘들이 연합해서 들어왔기에 그 정확한 피해를 알기는 힘들다. 그리고 주력인 시마즈군의 규모를 봐도 500척의 대함대에서 300여 척을 깨거나 나포했다는 것은 모두 믿기는 힘들다. 정확한 전과를 보고하던 이순신이 전사했고 밤이라 적의 규모를 정확히 알기 어려우며 진린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기 위해 부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20]

이 때문인지 시마즈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말도 나오고 # 이 항목과 시마즈 요시히로 항목 역시 이를 바탕으로 한 반박이 나와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여러가지 의문이 있다. 우선 시마즈군의 병력이 7천이라 하지만 이는 전투병력만을 따진 것으로 이보다 더 많은 수의 비전투원 역시 포함돼 있었다.# 노를 젓는 격군들은 물론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인부들을 모두 데리고 갔을 것이므로 그 수는 최소 두 배이다.

임진왜란, 세키가하라가 끝난 지 약 10년 후인 1609년에 오키나와 원정군으로 3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갔는데 도쿠가와의 침공에 대비해 역시 최소 3천 명 정도는 남겨둬야 했을 테니 그렇게 큰 피해를 입고 최소 6천 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도 근거인데, 이때는 막부에서 직접 시마즈가에 류큐를 복속시킬 것을 계속 명령했을 때로, 오히려 가진 걸 다 쥐어짜서 최대한 빨리 류큐를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는 시마즈가의 이익에도 연관이 되는 것으로 이후 류큐를 혹독하게 쥐어짰다. 또한 류큐 원정은 불과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5만 석 정도로 평가되는 대마도의 소 요시토시가 5천 명을 동원했고, 상술했듯 13만 석이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도 5천여 명을 동원했다. 농민들뿐 아니라 잡병들을 고용한 것이다. 빨리 안 하면 자기가 토벌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잡병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여기에 10년 동안 성인이 되었을 장정까지 생각해야 된다.

이에야스가 시마즈를 토벌하려 할 때 시마즈에게 병력 1만이 있다면서 부하들이 말렸다 하는데. 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미가타가하라 직후 코사카 마사노부는 시간을 끌면 노부나가가 8만을 이끌고 올 거라며 후퇴를 주장했는데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가 투입한 병력은 3만이었다. 그리고 설사 7천명이 정말 다 죽었다 해도 쥐어짜면 1만이 안 나오는 건 아니었다. 보통 석고 1만 석당 250명으로 계산하는데 시마즈가는 70만 석이었다. 이 250명은 말 그대로 보통일 뿐 여유로우면 덜, 필요하면 (힘들겠지만) 더 동원할 수 있었고, 조선처럼 바다 건너 멀리가는 게 아니라 방어전인 상황이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많아야 천육백 정도만 동원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21] 주로 한국에서 얘기되는 설로 일본의 경우 소설가 시바 료타료는 그 이유를 시마즈식의 동원체계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그 외에 요시히사와의 갈등으로 요시히로가 직접 모은 병력만 이끌고 갔다는 것, 내부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 등이 있다. 이에 관해서는 시마즈의 퇴각 항목도 참고하자.

결론을 말하자면 시마즈군의 (혹은 구원군 전체의) 9할이 전멸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시마즈군의 피해가 적었다고 하는 것 역시 무리다. 다이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세키가하라에서도 다 죽어도 영주 요시히로만은 살려보내는 게 당시 왜군이고 시마즈군이었다. 그런 시마즈 요시히로가 휘하 함대 하나는 아예 전멸해 남해도에 상륙해야 했고 자신도 다른 배에 구조돼 겨우 달아난 상황에서 피해가 적을 수 없다. 또한 가고시마의 무형 문화재인 상부연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들이 명복을 비는 것으로 그 배경은 다름 아닌 노량해전이다. 정확한 피해는 알 수 없어도 이런 상황에서 피해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시마즈군의 상황을 세키가하라 전투시마즈의 퇴각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요시히로만큼은 살린 점, 장수를 저격하는 식으로 나선 점 등이 비슷하다. 계획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요시히로만은 살려보내겠다는 목적은 같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난중잡록의 한 구절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왜군이 승리했다고 개드립치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 원문
兩軍突發。左右掩擊。矢石交下。柴火亂投。許多倭船太半延爇。賊兵殊死血戰。勢不能支。乃退入觀音浦。日已明矣。舜臣親自援枹先登追殺。炮賊伏於船尾。向舜臣齊發。舜臣中丸不省人事
  • 일본측 왜곡 해석
아군과 명군 양군이 돌발하여 좌우에서 엄습하니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을 마구 던져서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여 아군의 형세가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觀音浦)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 정식 해석
아군과 명군이 갑자기 튀어나와 좌우에서 덮쳐 화살과 돌을 던지고 횃불을 어지러이 던져 왜선 태반이 불탔다.

(문단이 바뀌어) 적병이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세가 지탱할 수 없자. 이에 관음포에 퇴각하였고. 그때가 날이 이미 밝았을 것이다. [22]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올라 추격하며 죽였다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5 노량해전의 무용론과 반론

산케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인 구로다 가쓰히로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적을 기어코 추격하다 전사한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순신을 떠받드나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깽판쳐놓고 도망칠 때는 곱게 도망치려고? 을지문덕 : 뭐 임마? 쿠투조프 & 수보로프 : 깔깔깔깔깔깔깔 강감찬 : ㅋㅋㅋ 더글라스 맥아더 : 응? 다시 말해봐. 뭐라고? 패튼 : ㅋㅋㅋ 라고 비판한 바 있다. 사실 이것은 노량 해전에 관한 대부분의 국까들의 평가이며 "평화롭게 후퇴하는 건데 왜 기어코 공격하냐? 괜히 공격하다가 죽었으니까 니 잘못이다." 식의 발언개드립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평화로운 주제에 선공하고 또 공격하냐? 하지만 만일 얌전히 보내줬다면 이들은 왜군의 위세에 눌려서 추격하지도 못했다는 개드립을 칠 것이 뻔하다. 즉, 처음부터 한국을 비방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국까들의 입에서만 나오는 의미없고 허섭한 트집잡기일 뿐이다. 흔히 말하는 적반하장(賊反荷杖).

아무튼 이 노량해전 무용론은 이순신과 당시 조선의 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멀쩡히 잘 지내고 있던 조선을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안 빌려줬다는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침공한 쪽이 어디인데. 그야말로 개드립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7년 동안 전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조선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 강간한 침략자들을 섬멸하는 것만이 7년 전란에 대한 일본을 징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23] 더욱이 전범 재판 같은건 있지도 않은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종전과 퇴각은 엄연히 다르다! 일단 당장 전쟁이 끝난 것을 조선 측이 알 도리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쟁을 포기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조선 측이 알 리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으면 전대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재개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내전에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임자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후대에 역사를 살펴보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그가 조선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 조선의 누가 그런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과 일본이 정식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광해군 1년인 1609년 기유약조를 맺은 후. 그 사이 약 1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휴전도 아니고 대치상태에 가까웠다. 철군약속도 명나라 장수들이 합의해준 거에 일본이 내부적으로 철군을 이미 결정한 것이어서 별 문제가 없었던 거지 조선이나 명의 공식입장이 아니였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대해 일절 침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골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빠돌이인지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을 경우 진짜 큰일날 수도 있었다. 주인니뮤가 해보지 못한 것을 이뤄 드리려고 도전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설령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끝내 재침략에 실패했다 해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는 건 그로부터 머나먼 미래에나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측 입장에서 일본의 철군은 종전 이후 철군이 아닌 전략적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였다. 구로다 가쓰히로의 말대로 후퇴하는 적을 고이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 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들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로 항복이 아닌 퇴각이나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히 전쟁범죄가 아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은 후퇴하는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어 향후 전쟁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노량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 전투와 다르게 왜군의 섬멸이 목표였고, 야간전이라 평소보다 근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전사자측만 보자면 노량해전이 없었더라면 이순신을 비롯하여 더 이상의 희생은 없었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6 이순신 자살설 및 은둔설

이순신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전사했다. 너무나 극적인 상황 때문에 일각에선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자살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이 왜군을 추격하면서 갑옷을 벗고, 지휘관실에서 벗어나 적군의 사거리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가족을 위해서는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게 낫다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왕조국가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수가 왕의 질투와 두려움을 사서 토사구팽당하는 예는 적지 않으며, 선조는 전쟁 중에도 이순신을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등 이순신을 증오하여 제거하려 했는데 전쟁이 끝났으니 더 심해질 것이라는 추측이다. 게다가 이순신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나며 공적이 알려지면 인기는 더욱 늘 것이고, 그를 억압한 조정에 대한 반감은 급증할 것이다.

이런 추측은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조차도 선조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바로 노량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후에 못볼 꼴을 당하지 않게 하였고, 이순신의 명예를 위해서 가장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자고로 하늘이 내린 사람은 하늘이 데려가는 법.

이순신 자살설은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심각하게 논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 때의 영의정 이여는 "충무공이 총탄에 맞기를 자처했다"라고 말하고 있고 신료인 이민서도 "당쟁으로 김덕령 장군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김덕령의 죽음을 논하면서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이순신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24] 또한 이후의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도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이명은 "공이 아무리 앞에 다가올 화를 걱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벼히 여겼겠는가?"라며 자살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사실 조선후기, 일제 강점기, 박정희 정부 연간에는 이순신 숭상 및 업적 재정리가 있어 아무도 자살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순신 자살설이 수면에 오른 건 남천우 박사가 역사비평에서 간행한[25] 이순신 전기에서 다시 들고 나왔다. 문제는 남천우 박사가 자살설을 지지하는 게 아니고 자살설이 있으나 강하게 부인하면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죽은 게 아니라 부하들과 짜고 변복해 숨어 소실집이나 본가의 다른 방에 은거하다가 20년 후에 진짜로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26] 꽤 많은 사람들을 낚았으나 근거가 전혀 없다.

남천우 박사는 이순신의 자서전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그 자서전이라는게 이분의 충무공 행록이다. 원래 숨어살면서 "나는..."이라고 쓴 자서전을 이분이 3인칭으로 바꾸었다는 이론이다. 물론 낚이지 말자.

사실 이러한 자살설이 나온 큰 이유는,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과 노량해전의 처절함이 어쩐지 자살하기에 딱 좋은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맥락을 조금만 안다면 노량해전은 생각 만큼 (조선 입장에서는)처절한 전투도 아니었고 이순신이 처한 상황 또한 자살하기에는 택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노량해전의 경우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작전에 말려들어 두들겨 맞다가 관음포로 도망간 상태에서 입구가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던 입장이었고, 조선은 신나게 궁지에 몰린 왜군을 두들겨 패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이순신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으며, 명나라의 장수이므로 전사하는 일이 벌여져서는 안 되는)진린이라는 변수,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던 야간이라는 상황이 (왜군 입장에서)운좋게 맞아떨어져서 이순신이 전사한 거지 이순신이 대놓고 갑옷을 벗고 날 죽이시오 했다는 것은 택도 없는 말이다.

그리고 자살설이 이순신 장군의 군인정신을 한편으로는 폄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해두자. 노량해전은 이순신 스스로가 그토록 원하던 전투였다. 이순신 본인이 일본군에게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라 전투에 큰 심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도 이순신은 조선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투현장에서 전 수군을 지휘하고 명나라군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이나 명령을 중재나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막중한 권한과 임무가 있는 것을 알면서, 스스로가 원했던 해전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살을 하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행한 행적과 군인정신을 폄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순신 입장에서 이 노량해전은 최후의 전투도 아니었다. 시마즈는 고니시군을 구원하러 온 것이었기에 격파했을 뿐, 이순신의 가장 큰 목표는 시마즈가 아니라 고니시였다.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자가 뒤에서 살아남아 버렸는데 그 책임감 강한 이순신 장군이 자살 같은 걸 하려 할까? 만약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살았다면 곧바로 고니시를 부산까지 추격했을 것이며, 아예 부산 근처에 돗자리 펴 놓고 왜군이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KBS 역사프로그램에서 이순신 자살설 및 생존설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다가 문중의 항의로 내용을 바꾸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이를 명량이 흥행했을 때 MBN프로그램인 아궁이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가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고. 즉 위대한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적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 한 것이라 평했다.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도독직을 받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자살을 택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수군 도독직은 명 품계상 정 1품으로 조선왕 이균과 약간의 의전상 차이가 있을 뿐 품계상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인정되는 주장은 노량 직전에 내려져, 이를 쓰일 길이 없었을 것이라 하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허나, 이순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성격이었는가? 직접 남긴 시를 봐도 제갈량에 비해 자기는 부족하다는 선입견이 박혀 있다.[27] 자기한테 유리한 것을 의도적으로 쓰지 않은 성격상 노량 직전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잃을 수 있다. 더구나, 왜란에서 분조를 이끌며, 사실상 명군으로서의 자질을 볼 수 있었다는 광해군은 즉위 이후에 실록에서 이순신에 대한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무엇이 이러한 일을 했을까? 현장에서 유명수군도독을 살아생전 수여받지 못한 것이라서? 차라리 명량 이후에 명에서 내려 보냈다는 점이 현실성이 높다. 사실 실록에서 이해가 안 되는 방향으로 결정되는 사례가 몇 있는데, 그 흑막에서 의견이 조율된 경우가 물증으로 발견되어, 실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집단이 누구인지, 이들한테 이득인지 엄청난 불명예인지를 생각한다면, 비공식적으로 받은 이 칭호로 인한 문제는 결코 가볍다라고 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 수군 도독직은 전사 이후에 받은 추서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정작 수여를 했던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이순신에 대한 도독직 수여가 수록되어 있지 않고,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들어 도독직 수여 자체가 명 멸망 이후 조선측에서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을 정도이다.도독인 등 팔사품 자체가 명 조정의 하사품이 아니라 진린 등 명 장수의 개인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7 미디어

워낙 유명한 전투이고 임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의 전사를 다루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선 꼭 방영하는 편이며 상당히 많이 극화되었다.

7.1 성웅 이순신

김진규가 주연 및 감독 을 하다 대차게 말아먹은[28] 성웅 이순신에서는 벌건 대낮에[29] 전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상당히 개념찬 명장 진린[30]이 나오는 것이나. 일본 측 장수로 고니시 유키나가[31]가 나오는 것도 개그.[32]

7.2 조선왕조 500년

조선왕조 5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마지막회를 빛내는 전투로 유명하다.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하늘에 기도하는 이순신을 연기한 김무생의 연기는 전율할 정도. 김무생은 그해 연기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순신의 최후도 적의 구원군[33]이 온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나가다 총에 맞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유언은 유언대로 하고 방패로 가렸을 뿐 아니라 지휘를 하는 것처럼 앉아서 서서히 사망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부하들도 마지막에야 장군이 사망한 것으로 알게된다. 진린은 이전부터 찌질이로 나오는데, 진린을 연기한 배우가 초반에 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한 명나라 장수 조승훈을 연기한 배우와 같다.(...) 다른 작과 달리 왜군이 진린이 탄 함선에까지 도선해와서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이 연출되며 이를 본 이순신이 진린을 구하는 충실한 고증이 여기에서는 나온다.

7.3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4회 ~ 5회 초반, 마지막회(104회)에서 나왔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치열한 전투신, 김명민의 연기는 꽤 인상적이다. 4회는 칼의 노래를 많이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설정으로 비난이 많았던 부분, 도자기 운운하는 도자기 덕후 왜군 일당,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동귀어진하는 이영남[34], 고질적인 파열탄 등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회(104회)는 4회와는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으나 4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4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4회와는 달리 역사상의 전투 기록과 대부분 비슷하게 나왔으며 파열탄, 동귀어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7.4 명량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의 시퀄 격으로 마지막으로 제작 예정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노량 해전이 될 예정이다. 가제는 노량 : 죽음의 바다[35]

7.5 징비록

징비록에서는 50화에서 묘사된다.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에 참전하는 역사 왜곡을 저질러서 고증면에서 높이 평가해 줄 수 없고, 이순신이 총탄에 맞는 장면이 발CG인 것, 또한 불멸의 이순신의 칠천량 전투씬 장면 일부를 재활용해 뜬금없이 거북선이 등장하거나 판옥선이 포격맞는 장면이 나온 것이 흠이다. 그래도 마지막 전투인 만큼 치열한 전투의 분위기는 잘 살렸다. 명나라 까기가 일상화된 작품인 만큼 본래는 격전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죽을 뻔할 정도로 위기를 겪었던 진린이 역사와는 달리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가 다 이겨가니 은근슬쩍 참전하는 걸로 묘사되었다.

7.6 임진왜란 1592

임진왜란 1592 5회에 나온다. 예산산의 문제로 대부분 징비록, 불멸의 이순신 장면을 재활용하였다. 그래서 전투 장면의 완성도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못 받으나 이전의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들과는 달리 노량 해전의 고증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는 역사 왜곡을 저지른 이전 사극과는 다르게 고증대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조명 연합군의 함대와 맞서 싸운다. 뿐만 아니라 진린의 함대 또한 이전 사극과는 다르게 열심히 싸우는 모습이 나오면서 발전된 명나라 묘사에 대한 높은 평가가 큰 수확이다.

8 여담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 당시 한국이 3대0의 스코어로 끌려다니다 9회에 4점을 내 역전하며 일본을 완전히 떡실신시켰는데, 공교롭게도 음력일로 따지면 11월 19일로 노량 해전이 일어난 날과 동일하다(...).
  1. 현재 남해대교가 있는 하동군남해군 사이의 바다이다.
  2. 大河平隆重, 시마즈 씨의 가신. 적함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3. 町田久政, 시마즈 씨의 가신.
  4. 池辺貞政,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가신.
  5. 이순신에 의해 대다수의 전선이 분멸되어 버렸기에 '철수'라고 하기보다는 사실상 '궤멸 패주'에 가깝다. 시마즈가 동원한 병력 중 대략 10분의 9의 병력이 작살나 버렸다. 현대전에서 3분의 1만 잃어도 전멸이다(...). 이건 시마즈 요시히로가 휘하 병력 대다수를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난 것으로 봐야 한다. 덤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도주했다.(...)
  6. 대표적인 왜성으로 순천 왜교성, 부산 서생포 왜성, 울산 왜성등이 있다. 이중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울산 왜성을 둘러싸고 울산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7. 여기에는 아마도 애초에 순천 왜교성 자체가 왜군 주둔 왜성 중 가장 서쪽(혼자 전라도에 있다. 나머지는 모두 경상도)에 있었고 호남 재진출 기도 시 교두보가 될 만한 곳이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타겟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명나라 육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유정은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공격하는 척만 하다가 중단해 버렸다. 거기다 진린이 조명연합수군의 공조를 깨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가 위기에 빠지자 이를 구하다가 이순신의 휘하 장수와 병사까지 희생되는 병크가 벌어졌다.
  9. 시마즈는 노량해전 이전부터 몰래 연락선을 보내 고니시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번은 순천에서 돌아오던 배가 풍랑을 만나, 시마즈 요시히로의 가신인 시키네 요리모토(敷根頼元)와 가마타 마사토미(鎌田政冨)가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10. 군사력은 병력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란체스터 법칙이 당대의 해전에서 가장 잘 적용되며, 물량을 이용하여 포위하는 것은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실제로 시마즈가 옳은 판단을 한 것이며 만약 이순신의 전술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이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1. 왜군 함선 세키부네의 방향 전환 능력이나 안정성은 판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것이 전란 내내 큰 약점이 되었으나 본래 전방 기동성에 특화된 군선답게 전방 기동력은 뛰어났음이 확실하다.
  12. 수적 열세를 장거리에서의 포격섬멸로 극복하던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전술을 생각할 때 이는 큰 어려움이 되었을 것 이다. 실제로 노량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 전사자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음을 알 수 있다.
  13.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표현한다. 여기서는 이순신이 "단 하나의 조선 수군도 동요해서는 아니 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한다. 다만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표현이 이순신 위인전에도 나온 적이 있다는 말도 있다.
  14. 마찬가지로 명량 해전 역시 선조가 중국 장수에게 말하는 것에서 인용된 것밖에는 확실한 장계가 없다. 따라서 명량 해전과 노량 해전 사이에 있던 전투들이 축소되거나 기록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린에게 수급을 나눠준 것으로 유명한 왜교성 전투가 있다.
  15. 임진왜란 당시 운용한 화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의외로 일본 장수들의 전사율은 높지않았다. 조선군의 장수들이 조정에서 임명한 군인 관리의 성격이라면, 왜군의 장수들은 각각 별도의 영지와 백성을 거느린 봉건 영주들이였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기업의 부장급이랑 여러 회사의 재벌총수급. 장수가 죽으면 밑의 가신들도 길바닥에 나앉는 실업자 신세가 되기에 부하들은 기를 쓰고 장수를 보호하려 했다.
  16. 사실 임진왜란 중에도 수많은 조선 지휘관들이 저격당했다. 1차 진주성의 김시민은 명백히 시체 속에 숨어있던 조총수가 쏘아 맞혔고 2차 진주성의 황진의 경우 전투 이치에서는 머리에, 다른 전투에서는 2번이나 맞아 저승 문턱에 올랐고, 2차 진주성의 경우 전공 확인을 위해 머리를 내민 그 "짧은" 순간 저격당했다.(생전에 총을 4발이나 맞은 것이다.) 임진사를 살펴보면 저격당해 죽은 조선 지휘관의 수는 제법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교리 자체에서 저격을 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담이지만 영화 가케무샤에서도 다케다 신겐은 공성 중 저격으로 총에 맞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17. 그러나 고니시는 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의 내전에서 서군 측의 주요 다이묘로 참가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하니 고작 2년을 더 산 셈이다. 차라리 조선에서 죽었으면 나름 명예도 올라가고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그 자손이 명사로 대접받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역시 역사에 만약은 없다.
  18. 시마즈 가문의 기록인 일향기, 정한록 등이 출처로 2차 출처는 역사추적 임진왜란(윤인식 저)이다.
  19. 시마즈군이 큰 피해를 입고 포위됐을 때 다치바나군이 조명연합군의 후방을 찌르고 들어오면서 난전이 됐고, 요시히로도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 진린은 이후 남해도에 상륙한 적 패잔병을 공격하면서 남해도 백성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는데, 이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백성들을 위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21.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직후로 내부사정이 어려웠기에 시마즈가는 그 규모와 히데요시의 요구에 비해 동원한 병력이 적었고, 이마저도 힘들게 마련했다. 그게 피해를 입은 것이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많이 않았을 가능성 또한 현실이다. 상식적으로 동원할 병력이 있어야 동원 운운할 게 아닌가?
  22. 일반문장이 나오고 그 결과 세가 불능지라면 즉 전문장과 뒤문장이 반대되기에 항상 보조사는 그러나가 된다. 만약 '하여' 라는 순응적 결과 즉 주어가 바뀌는 문장이 오게된다면 그 바뀐 주어가 나온다.
  23. 명이 일본에 대한 반격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이미 명백히 밝힌 상황인 데다 전후 도요토미 가문도 몰락했고 새로 권력을 잡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기간 내내 전쟁에 불참하는 등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도요토미 사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을 대신하여 에도에 막부를 개설하여 쇼군에 취임한 이후 조선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고 성의표시 차원에서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 일부를 송환했다. 다만 막부 정권의 특성상 이미 전쟁을 위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한 다이묘들에게 이 이상 전쟁책임을 강제할 수단이 없었고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다이묘들도 전쟁이 끝나고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편을 바꾼 상태였다. 이에야스 입장에선 최대한 할 만큼 한 것.
  24. 다만 이민서가 쓴 "갑옷을 벗고 싸웠다." 부분은 '열심히 싸운다'는 뜻의 관용적 표현임이 정설이다.
  25. 사실 이론이 너무나 허술하고 사료적 가치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진영문제로 상대적으로 듣보잡 마이너한 역사비평사에서 출간할 수 있었다
  26. 사망한 지 3일뒤에 묻혔고 20년 뒤에 현재 위치에 이장한 건 맞으니까 사실은 그때 안 죽고 이장할 때 죽었다는 논제.
  27. 아이러니하게 이순신 장군과 제갈량의 시호는 "충무"이며 세상을 뜬 나이도 똑같이 54세이다. 군왕의 신뢰를 한쪽은 받지 못했고 한쪽은 아주 전폭적으로 받았다는 차이는 있지만.
  28. 당시로서는 세트장 재활용이나 테마파크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노량 해전을 찍으면서 촬영에 사용된 소품을 다 태워먹었다.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사회 후 서운한 점을 지적한 이유로 소품을 또 만들어 다시 촬영했다
  29. 위 항목을 보면 알듯이 전투는 야간에 벌어졌다
  30. 배우 주현이 열연
  31. 영화에서는 박동룡이 열연했다. 어차피 이 작품에서 주요 왜장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유일하다.
  32. 고니시 유키나가가 노량해전에 참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엄연히 이 전투의 일본 측 주장은 시마즈 요시히로다. 고니시는 왜교에 대한 조선수군의 공세가 느슨해진 틈을 타 도주했다.
  33. 아마도 시마즈 군의 지원인 것 같다.
  34. 와키자카 야스히루는 멀쩡히 살아 돌아가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활약하고 자연사한다.
  35. 다만 노량이 실제로 제작될지는 첫 번째 시리즈인 명량과, 두 번째 시리즈인 한산의 흥행에 달려 있다. 일단 명량은 흥행에 대성공했으므로 이후는 한산의 흥행에 달린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