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 전투

뉴올리언스 전투
날짜
1815년 1월 8일
장소
미국 뉴올리언스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미국대영제국
지휘관앤드루 잭슨에드워드 파켄엄†
전력불명11000명
피해 규모21명 전사2,037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1 배경

미영전쟁이 시작된 후 영국은 미국을 간단히 굴복시킬 거라고 여겼으나 백악관을 불태우고도 오히려 9월 12~14일간 볼티모어를 점령하려고 했던 영국군은 대규모 사상자만 내고 실패했다. 전황이 지지부진해지자 영국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리인 것으로 판단했고 1814년 12월 24일 켄트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정작 아직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1] 군대는 계속해서 전투를 했는데 뉴올리언스 전투 역시 그중 하나였다.

2 전투 전개

영국군은 멕시코 만 원정대의 육군을 지휘하기 위해 에드워드 파켄엄 공을 파견했다. 한편 이때 민병대를 이끌고 있던 잭슨은 뉴올리언스가 다음 영국군이 노리는 주요한 요충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2] 이에 잭슨은 영국군이 그나마 괜찮은 길인 항구인 모빌에 상륙해 육로로 진격할 거라고 예상하고 모빌을 요새화한뒤 상비군을 남겨두고 뉴올리언스로 진격했다.

2.1 영국군의 움직임

영국군은 임시 사령관 킨의 주도하에 루이지애나 해안에서 떨어진 무인도 몇 군데에 상륙했다. 원정군의 나머지는 곧 킨의 선발대에 합류했다. 12월 23일 킨은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1800여명을 물 위에 낮게 뜨는 보트로 이동하여 보뉴 호수를 건넜다. 이에 맞설 미군은 버엔버뉴 강의 한 줄기를 막지 않았는데 영국군은 잭슨이 이끄는 미군의 소형 전함을 쫓아낸 뒤 버엔버뉴 지류를 발견하고 그 곳의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루이지애나 민병대 사령관 자크 필립 데 빌리에르 소장의 설탕농장을 발견했다. 그들은 농장 막사로 기어들어가 소장의 아들인 르네 필립 가브리엘 밀리에르 소령을 기습한 후 보초를 세우고 급사를 보내 파켄임과 나머지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2.2 미군의 움직임

영국군이 뉴올리언스에서 2시간밖에 안되는 거리까지 진격해 왔지만 미군은 미처 영국군이 여기까지 온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빌리에르 소령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고 잭슨의 본부로 들어와 영국군의 상륙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잭슨은 먼저 선제공경를 하기로 결심하고 돛단배 캐롤라이나 호를 강 아래로 보내 영국군 진영에 대포를 발사하게 했다 그 후 잭슨은 보병을 보내 영국군 진영을 공격하게 했고 아군의 포격을 맞게 하지 않게 위해 포격을 중지했다. 민병대는 일제 사격을 한 후 영국군에게 돌격해 그야말로 영국군을 무참히 도륙했다. 이날 밤의 공격에서 잭슨의 민병대는 24명이 죽고 115명이 부상당했으며 74명이 포로로 잡혔지만 영국군은 46명이 전사하고 167명이 부상당했고 64명이 포로로 잡혔다.

2.3 파켄엄의 도착

12월 25일 파켄엄이 주력부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는 캐롤라아나 호와 루이지애나 호 등 미국 전함에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그는 강변에 경포들을 배치하고 대포알을 뜨겁게 달군 탄환으로 만들기 위해 화덕을 설치했고 준비가 끝난후 배들이 나타나자 뜨겁게 달군 대포알을 발사해 캐롤라이나 호는 불길에 휩싸이고 루이지애나 호는 바람이 불지 않아 선원들이 노를 끄는 보트들을 내려놓고 배를 끌고 가야 했다. 잭슨은 아군 전방의 땅에 물이 흐르도록 둑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 그는 병사들을 보내 쉬지 않고 삽으로 땅을 파고 흙을 쌓아 길이 1.5미터 ,해자(운하)깊이 1.2미터 폭 3미터의 벽을 만들었다. 이어서 미시시피강과 사이프러스 나무 습지 사이에 늘어선 전열은 1400여미터에 달했다. 낮은 벽 뒤에는 32파운드짜리 대포 24파운드 대포,18파운드 대포와 함께 작은 대포들도 배치했다. 잭슨 장군은 미시시피 강 건너편 우익에 24파운드짜리 대포 한 문과 12파운드 대포 2문을 올려 작은 보루를 쌓았다.

2.3.1 영국군의 선제 공격

파켄엄은 먼저 12월 28일 선제공격을 가했다 .이 때 영국군은 워싱턴에서 미군을 섬뜩하게 만들었던 콘그리브 로켓을 발사했지만 잭슨의 군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장거리에서 쏘는 영국군의 포격도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루이지애나 호가 다가오는 영국군 보병 행렬을 발견하고 대포를 발하샜다. 또한 운하 뒤에 있는 미군의 대포와 미시시피 강 너머의 대포가 포격을 가했고 그리고 미군의 소총수들도 일제히 사격해 영국군의 피해가 오히려 늘어나자 파켄엄은 공격을 중지했다. 밤에 영국군은 대포를 끌고가 질퍽질퍽한 평지를 넘어 미군 전열 600미터 내지 700미터 지점까지 가서 진흙을 채운 설탕통 뒤에 대포를 설치했다. [3] 1월 1일 파켄엄이 다시 공격을 개시 했지만 영국군의 포는 포대가 고르지 않아 정확도가 부정확했다. 결국 미군의 대포가 영국군의 대포를 박살낸 후 파켄엄은 보병공격을 취서했고 영국군 포수들은 세찬 빗속에서 대포를 끌고 돌아가야 했다. 잭슨은 이어서 영국군 진영으로 저격수를 보내 영국군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했다.

2.4 영국군의 총공격

1월 8일 영국군이 총공격을 개시했다. 파켄엄의 군사들은 둑을 뚫어서 영국배들을 강에 띄웠다. 영국 해병과 선원들은 정규보병연대에서 뽑은 경보병들 및 웨스트 인디언 연대들과 함께 강을 건너 잭슨의 분견포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들은 대포를 빼앗아 미국인들에게 조준할 계획이었고 그동안 부대의 나머지는 잭슨의 부대를 공격했다. 붉은 군복을 입은 영국 병사들의 긴 행렬이 미국 전방 1.5킬로미터 지점에서 미군의 눈에 띄었지만 사이프러스 늪지대 사이로 들어가던 서인도 제도의 병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고 [4] 또다른 서인도 제도의 연대병사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5] 소장인 사무엘 깁스 경은 2200명의 병력으로 잭슨의 중앙 왼쪽을 들이쳤지만 미군의 18파운드 대포 포격과 태네시와 켄터키 민병대의 반격으로 공격은 지지부진했다. 킨 소장은 1200명의 병력으로 잭슨의 오른쪽을 공격했지만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깁스의 행렬 선두에 섰던 제 44보병연대는 운하의 채울 나뭇단과 운하 제방 겸 낮은 벽을 기어오르는 데 쓸 사다리를 가져 오기로 되었지만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오지 않음으로써 깁스가 다시 가져오게 했고 그동안 시간이 지체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잭슨의 분견포대를 공격하기 위해 보내졌던 부대가 예상보다 8시간이나 늦어졌고 그들이 도착해 대오를 이룰 때에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있었고 분견 포대의 대포들은 미처 준비가 안된 영국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그나마 서인도 제도의 병사들이 제때 공격을 가했지만 미군의 주력부대와 강 건너편의 포대의 공격에 의해 후퇴해야 했다. 킨의 공격부대는 원래 미군의 오른쪽을 치기로 되었지만 깁스의 군사들이 미군의 포격에 우왕좌왕 하는 것을 보고 비스듬히 진격해 다른 공격부대와 모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미군의 대포와 소총수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2.5 영국군의 대참패

마지막으로 영국군이 저지른 큰 실책은 총공격이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영국군은 미군의 조준사격을 두려워해 밤에 공격을 개시할 생각이었지만 해가 너무 일찍 솟았다. 영국해군이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미시시피 강으로 왔지만 이또한 전투장소에서 아래쪽인 세인터 필립요새에서 저지당했다. 결국 영국군의 지휘관이었던 파켄엄 , 킨 , 깁스등 세명의 지휘관은 전사했고 미국대포들은 산탄과 포도탄을 마구 발사했다. 라이플 소총수들은 붉은 제복의 병사들이 400미터 가량 앞에 왔을 때 사격을 개시했다.[6] 결국 막대한 손실을 입은 영국군은 퇴각해야 했다.
  1. 당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소식이 전해지는 데만 무려 6주가 걸렸다고 한다.
  2. 문제는 뉴올리언스가 미시시피 강 어귀에서 17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으며 뉴올리언스가 세워진 미시시피 강 삼각주 지역은 습지와 늪지대가 많아 지나가기가 어려웠다.
  3. 미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밤에 설치했는데 그랴서 포대가 고르지 않게 되었다.
  4. 그들의 역할은 미군 오른쪽을 공격해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5. 이들은 잭슨이 강 건너편에 쌓아놓은 포대진지가 목적이었다.
  6. 잭슨의 부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많았으며 소총은 유효 사정거리가 머스킷 총의 다섯 배 내지는 열배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