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필씨(大興弼氏)는 고려시대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前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이라는 인물이 이의민에게 살해 당한 고려 왕 의종을 관에 옮겨서 물가에 묻었다 라고 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시조는 알 수가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필몽량(弼夢良)이 무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후손인 필두만(弼斗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필성뢰(弼聖賚)는 179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필성뢰(弼聖賚)의 조부는 필흥방(弼興邦)이며, 증조부는 필두만(弼斗萬)이며 외조부는 이춘발(李春發)이라고 기록되었다. 필성뢰(弼聖賚)의 아버지는 학생(學生) 필은상(弼殷相)이고 형은 필성려(弼聖礪)가 있다.
- 국조방목(國朝榜目)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