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민

무신정권의 집권자
3대 경대승4대 이의민5대 최충헌
이름이의민(李義旼)
생몰년도? ~ 1196
직업고려무신[1]
본관정선 이씨
배우자최씨

1 개요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네번째 집권자.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무신정권 시대를 풍미하였던 집권자들 중 한 명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가 간 인물.

한때는 천민 출신으로 멸시받으며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았으나 우연히 얻은 기회로 출세하고 한때는 고려의 천하를 한 손에 쥐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화려하게 비상했던 것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2 생애

2.1 초기일생

경주 출신이라 경주 이씨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절대 경주 이씨가 아니다.[2] 본관은 강원도 정선(旌善)이다. 족보에 따르면 이의민의 6대 조상인 시조 이양혼은 안남국(베트남) 리 왕조의 태자로, 리 왕조 제5대 황제 신종 이양환의 아우로 신종과 왕위를 다투다가 북송으로 망명하여 송나라 문하시중이었던 진(陳)씨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송나라 휘종때 금나라의 공격으로 북송이 쇠하고 남송으로 전환된 1127년에 고려로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는 중시조가 각각 이용상과 이양혼이며 시조는 이씨 월남국의 건국자 이공온을 본시조로 섬긴다. 각 가문의 중시조 이전의 선계는 안남 이씨로 판단한다. 즉 '화산'은 마지막 왕자 이용상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려 고종에게서 화산군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음으로써 안남 이씨에서 화산 이씨로 바꾼 것이고, 이양혼의 정선 이씨는 6세손 이의민과 별개로 9세손 이우원이 정선에 세거함으로써 정선 이씨가 된 것이다.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옥룡사의 노비였으며[3] 3남으로 막내. 천한 신분이었지만 8척이나 되는 신장에 기골이 장대했다. 그 힘을 주체 못하고 자신의 형들과 함께 사고를 치다가 체포되었는데, 경주 안렴사였던 김자양이 심한 고문을 가하여 그의 형제들은 죽었지만 뛰어난 용력 덕분이었는지 용케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김자양이 그를 무관으로 발탁하였고 경군에 속하게 되었다. 수박(무술)을 잘해서 의종이 총애했고 별장의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의민은 자신이 최고 실권자였지만 천민인 탓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신정권 속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그 자리에까지 올라왔으니...사료에 따르면 김사미 · 효심의 난이 일어났을때 이의민이 직접 식량과 무기 지원도 했다고 한다. 김사미·효심의 난은 양인들의 농민 전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자신의 신분에 동병상련을 느낀 게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자기 고향 경주와 같은 구 신라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을 이용해 반역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의민이 참살당한 뒤 그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이의민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한 조작으로 보기도 한다.

2.2 무신정변

경군에 발탁된 이의민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데다가 수박(무술)을 잘했기 때문에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덕분에 이의민은 천민 출신 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견룡군 대정이었다가 나중에는 별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의민이 군인이 되어 출세하였던 때에는 문관들과 무관들의 갈등이 격해지고 왕이 주색에 빠져 국정이 혼란해져 있었던 때였다.

1170년 8월, 마침내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한 정중부, 이의방 등이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을 일으키자 이의민 역시 이에 가담해 문신들을 마구 죽였다. 기록으로는 이의민이 죽인 사람의 숫자가 제일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천대받은 울분이 폭발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살육을 즐겼거나. 만일 후자라면 흠좀무. 사실 이의민은 천출임에도 불구하고 의종의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총애를 받은 편이기 때문에 의종으로서는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무신정변 당시 이의민의 직급은 정7품 별장이고 견룡행수 이의방은 정8품 산원으로, 품계상으로는 이의민이 이의방의 상관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변 당시 견룡군이 이의방과 이고에 의해 장악된 상태에서 견룡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 이의민이 주모자인 이의방의 전략에 수긍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이행했다는 점, 이의민의 별장 승급이 정규 지휘관 코스를 밟는 것이 아닌 의종의 눈에 들어서 가능했던 특별승급이라는 점, 그리고 천민 출신과 나름 가문빨을 받는 출신이라는 출신 성분의 차이 등을 감안한다면, 견룡군 내에서 이의민은 품계에도 불구하고 종9품 선임대정 내지는 정9품 교위 정도의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라 계급이라는 소리 물상병이 조기진급해서 병장이 된다고 꺾상 무시할 수 있나? 군필자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전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이의방이 이의민을 하대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이후 개경 진입이 성공한 이후 이의방은 정중부, 이고와 함께 요직을 차지하여 명목상으로도 이의민의 상관이 된다.

이의민은 이 공으로 중랑장으로 진급하였으며 곧 장군으로 다시 승진했다. 이후 1173년 10월에 무신들의 정변에 반발한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의종 복위 음모를 막기 위해 산원 박준위와 함께 의종의 유배지인 경주로 직접 내려갔다. 같이 술상에 앉아 기회를 엿보다가 의종의 척추를 접었다펴서(…) 시해한 후 시체를 가마솥에 넣어 연못에 던졌다. 어쨌든 이 공(?)으로 대장군까지 직위가 오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후대해준 의종을 직접 죽였기 때문에 이후로 두고두고 반대파에게서 '배은망덕'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낙인이 찍혀버렸다. (경대승이 집권한 후 축하연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라고 일갈한 것이 대표적)

이어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정동 대장군 지병마사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이 난을 진압하고 1177년 5월에 보향산에 모인 김보당의 잔당을 공격하여 300여명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이 난을 진압하던 도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군사를 이끌고 돌격하여 적들을 개발살 냈고, 그 다음 벌어진 전투에서는 직접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었다. 하후돈이 화살에 눈을 맞고도 잃고도 적장의 목을 땄다는 건 소설이지만, 이의민은 진짜로 그걸 했다.

이후 1181년에 형부 상서 상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무신정권을 문신정권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4월에 병을 핑계대고 고향 경주로 낙향하였다.

2.3 집권

1183년 7월에 경대승이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병사하자,권력에 공백이 생겼고 이의민이 자칫 경주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킬까봐 두려워 한 명종에 의해 1184년 2월에 공부상서에 임명되었다. 이의민이 다시 수도로 돌아오게 되자 곧 그의 천하가 열리게 되었고, 그 벼슬도 수사공 좌복야에 이르었다. 이후에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1190년에 동 중서문하 평장사 판병부사에 임명되며, 1194년에는 공신에 임명된다.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는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인데,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면 군대를 보내 진압하면 그만인 상황에서 굳이 그를 개경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만 명종무신정권이라는 쿠데타로 인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으며 자신을 옹립한 군부의 지원 없이는 정권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신정권을 주동했던 고위무장들이 살해 당하거나 자연사한 상태고 심지어 경대승마저 죽고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명종 자신은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이 없음에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고 이의민을 불러왔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권세를 누리는 것에서 한발 더 나가, 아예 왕이 되겠다는 야심이 생긴 이의민은 십팔자위왕을 퍼뜨리며 반란을 일으킬 궁리를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집에다 사당을 차려놓고 경주시 일대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란 나무 귀신을 밤낮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후 경주와 울산에서 김사미, 효심 등이 신라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자(김사미 · 효심의 난) 이의민은 토벌군에 파견된 아들 이지순을 통해 은밀히 이들과 연결해 이들이 배후를 교란하는 사이에 반란을 일으켜 왕을 제거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계획하게 된다.

2.4 처참한 말로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그르치고 말았는데, 바로 아들들의 만행이 문제였다(…). 토벌대에 파견된 아들인 이지순은 김사미, 효심과 내통한 것이 들켜서 제 구실을 못했다.[4] 또한 다른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도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나쁜짓들은 골라 했다. 이 둘을 가리켜 쌍도자(雙刀子), 즉 쌍칼같이 흉폭한 아들이란 악명으로 불렀을 정도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지영이 최충수비둘기를 다짜고짜 뺏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사》에는 워낙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다.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서 이지영이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온다. 참고로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연락용 비둘기였다는 추측도 있다.

아무튼 이것이 발단이 되어 최충수와 그의 형 최충헌이 이의민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미타산의 별장에 있던 이의민은 습격을 받아서 1196년 4월에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최충수가 말을 타고 있는 그를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최충헌이 덤벼들어 칼로 베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에 목을 베었다고 하며, 아들인 지광과 지영은 그 자리에서 잠깐 피했지만, 결국 이들도 잡혀 죽는다. 이지순과 이지광이 먼저 죽고 이지영은 모든 걸 포기했는지 마지막 죽기전에 해주로 달아나서 거기서 잔치를 벌이며 즐기다가 장군 한휴에게 그 자리에서 목이 베어졌고 이의민 3대 일가를 모두 참살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비둘기 한마리 때문에 죽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최씨들 역시 음서로 벼슬을 할 만큼 권위가 있는 가문이었지만 그들의 재산을 이의민 일가가 함부로 뺏어갔다는 점은 그들이 얼마나 앞뒤 안 가리고 다녔는지 짐작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의민은 본래 천민이었는데, 천민 출신들이 귀족 출신의 무장들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고 다녔으니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던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도 한 가지 시사점으로 비둘기는 이의민과 그 일족을 제거하게 만드는 구실이었다. 《고려사》에 실린 이의민 열전과 최충헌 열전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에 최충수가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을 제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바로 얼마 뒤에 이의민 일파가 제거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찍부터 이의민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발적인 사고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최충수 형제가 애초부터 이의민을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면,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찾아간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기 때문. 음모를 꾸미고 있으면 거사일까지 안 들키기 위해 싸매는 게 정상인데 이렇게 대놓고 이의민 일가에게 원한 살 일을 할 리가 없기에, 정말로 그냥 비둘기 빼앗긴 데에 빡쳐서(...) 질러버린 걸 수도 있다. 혹은 이렇게 당돌하게 찾아오는 놈이 암살 음모를 꾸밀 리가 없다고 이의민이 역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한 최충수의 큰 그림이거나, 아니면 그냥 최충수가 생각이 없어서 거사가 발각될 위험은 생각도 않고 돌려달라고 했거나(......)

3 민폐력

사실 대단히 힘이 장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 상당한 무장이었던 모양이다. 궁궐의 그 굵고 아름다운 기둥을 주먹으로 치면, 그 기둥이 크게 요동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같은 시대의 무장이었던 이의민의 라이벌 두경승은 벽을 주먹으로 쳐서 뚫어버렸다. 물론 그 힘을 자기를 위해서만 써서 심각한 민폐를 끼친 건 문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고의 민폐력을 끼쳤던 일은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두경승과 힘자랑을 벌였던 사건. 이의민이 두경승을 겁먹게 하기 위해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기둥을 쳐서 울려버렸고 이에 질세라 두경승도 벽을 맨손으로 뚫어버렸는데, 이것이 당시 국가의 중요 회의 기관이었던 중서성에서 벌인 짓(…). 그 싸움의 정도가 극심하여 두 사람이 만나 눈을 마주치면 주위 사람들은 괴수들의 싸움에 휘말릴까봐(…)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당시에 이런 시도 나돌았으니 그냥 말 다했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에서

하지만 이런 대외적인 호방한 면모와는 달리, 자기보다도 어린 경대승이 집권하자 쫄아서 낙향하여 두문불출한것도 모자라 왕이 친히 불렀는데도 사양하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상당히 입지가 불안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대승의 경우 이의민을 척살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어려웠을 것이고, 왕이 부른 건은 당시 조원정이 득세하던 시기라 주저했을 여지가 크다.

4 평가

고대부터 귀족정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사에서 사실상 최초로 천민 출신으로서 자신의 무력적 소양을 바탕으로 나라의 실권을 거머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후 집권자 중 김준과 함께 거의 유이한 사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의민이 누렸던 10여년간의 장기집권은 선대 집권자 경대승이 마련해 놓은 기반 덕분에 가능했다. 경대승 이전의 무신집정들은 고려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에 매여있어서 권한이 축소되어 있는 부분이 있었고 이런 묘한 상황 덕분에 그나마 권력의 견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경대승의 집권 과정에서 벌어진 쿠데타에서 경대승이 첫 타겟으로 삼은 상대가 바로 중방인데다가 경대승의 집권 전 후를 기점으로 하여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고위무장들이 줄줄이 자연사 하는 바람에 경대승이 사망하자 마자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명종이 왕정복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무신정변을 통해 옹립된 왕이라서 그런지 무장세력이 아니면 자신을 옹호할 정치집단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무신정변 참여자 중 한명이었던 이의민을 불러올렸다.

여기서 만족하여 기존 무장세력과 정치세력들과의 타협을 통해 권력유지를 노렸다면 최충헌에게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의민 자신이 천민 신분이었기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자신이 정점에 올랐다고 판단되자 바로 전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자신의 권력을 견제할 상황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의민은 빠른 속도로 조정을 장악해 나갔다. 의외로 정치력이 뛰어났는지 아니면 이의민을 제거할 정치세력이 전무할 정도로 권력의 공백이 심했는지 용케도 10여년간의 기간 동안 장기집권을 하였다.

하지만 도를 넘은 행동들이 심했는데 특히 훗날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자리는 탐을 내지 않은 최충헌과는 달리 십팔자위왕이라는 예언만을 믿고 자리를 노리는 행동을 대놓고 하여 이의민의 반대세력에게 공격을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거기다 가족들도 막장이라서 이의민의 처 최씨는 상당히 포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의민이 총애하던 여종을 때려 죽였으며 남자 종과 간통까지 저질러 쫓겨난 인물. 그리고 이의민은 이 이후에 많은 양갓집 규수들을 데려다 결혼하고 싫증나면 차버리는 민폐짓을 저질렀고 그 부모를 닮아 아들들도 개판이라 함부로 아무 여자나 겁탈하고 건드리기 일쑤였다. 거기다 자기 딸 또한 어머니를 닮아서 남편인 이현필이 아예 딴 방에서 지낼 정도였으며 그 아들 이진옥 또한 외가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다. 콩가루 집안.

최충헌에게도 반면교사가 된 인물이다. 훗날 희종최충헌을 살해하려고 주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충헌은 희종을 유배 보냈을뿐 해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이의민이 의종을 살해하면서 얻은 수많은 클레임과 [5] 악조건을 지켜 본 결과로 설명된다.

5 무인시대에서의 모습

b_0069.jpg
KBS의 전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중견배우 이덕화가 이의민 역으로 열연했다. 별명은 금강야차. 주무기는 도끼로, 작중에서는 도끼를 뜻하는 한자어인 부월(斧鉞)이라고 불렀다. 힘이 장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덕화와는 이미지가 조금 안 맞는 것도 같았지만. 극의 초기엔 매회마다 근접용인 큰 도끼(鉞) 외에 투척용인 작은 도끼(斧)를 부메랑처럼 적에게 던지는 장면이 한번씩은 꼭 나왔다(그 빈도는 갈수록 줄었지만). 극의 초반이 지난 30화에서 이의민의 책사+정신적 지주두두을 선사가 등장하여 그에게 더 크고 좋은 강화 도끼를 선물함으로서 템발이 더욱 강해졌다. 작중 이의민의 언급에 따르면 80근(약 48kg)은 족히 나갈 것 같다며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처음엔 신라를 부흥시켜 백성을 구하려는 생각도 했지만, 권세에 취해 결국 파멸하는 걸로 그려진다. 미화도 조금 들어가긴 했으나 이는 "절대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주제의식을 위한 극적 허용의 한 부분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작중 무력 스탯이 만렙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용력을 자랑하며, 1:1 싸움에서는 진 일이 거의 없다. 경주에서 올라와서 견룡군에 입대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에, 견룡군 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이의방과의 수박 대결에서 줄줄이 발리는 장면이 있었다. 이후 이의방에게서 무예를 배우면서, 또한 지기지은을 입어 그의 심복이 된다. 드물게 그가 적수와 호각을 다투었던 장면으로는, 소드마스터경대승과의 한밤중 결투 씬과, 아래에서 언급할 두경승과의 자잘한 대결들을 꼽을 수 있을 정도. 사실 경대승과의 일기토는 그의 집을 습격하기 전에 이미 이의민은 토혈을 심하게 하는 등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투씬을 보면 힘에서 여전히 우위를 보였던 이의민을 유연한 경대승이 끝까지 막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쇤코프키르히아이스대결인가! 그런데 그 싸움에서 퇴각한 이후 경대승에게 경각심을 집어먹고 경대승이 죽기 전까지는 상경하지 않는다.

두경승과의 사이는 사서에서처럼 기둥뿌리 뽑는 무식한 쌈박질 묘사 같은건 없고 그냥 서로 야려보는 정도였다. 다만, 무신정변 직후 낙향한 두경승을 데리러 가서, 서로 바위던지기 캐치볼가짜 돌 티가 팍팍 나는 걸로 힘을 겨룬 장면이 있었다. 또 두경승은 검으로, 이의민은 도끼로 잠시 격돌한 씬도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이의민이 죽자 두경승 쪽에서 안타까워하며 탄식할 정도로 내심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였다. 츤데레? 애당초 주무기 자체가 이의민이 무지막지한 도끼인 것과 달리 두경승은 점잖게도 .

아무튼 워낙 활약이 후덜덜했기 때문에 시청자 게시판에서는 작중 캐릭터 최강 논쟁에서 거의 고정 No.1을 마크했을 정도. (No.2는 이의방.)일단 힘 쓰는 묘사만 나오면 사극이 판타지로 변한다. 얼마나 활약이 인상깊던지 심지어 북한 화가가 극중 모습을 그려서 헌상하기도 했다. 미국에 무인시대가 방영되었을 때도 미국 쪽 한인들이나 미국인 시청자들에게 제일 인기 있었던 캐릭터라고 한다. 극중 이의민의 별명인 금강야차는 미국에서는 Archfiend로 번역되었다.

최후에는 김갑수가 연기한 최충헌의 사병들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펼쳤으나 심복들도 참살당하고 탈진하여 곧 몸이 포박되어 말에 끌려다니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였다[6]. 그러한 상황에서도 포박된 밧줄을 도끼로 쳐서 탈출하는 신기를 보였으나 결국 머릿수를 당해내지 못하고 죽었다. 마지막 순간, 무릎을 꿇고있는 그에게 최충헌이 마지막 자존심을 운운하며 비수를 던져주며 자살을 종용하나, 최충헌이...네 정녕 천하를 얻고싶다면 네 손으로 내 목을 베거라!라는 말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켰다. 127회 퇴장. 시신까지 치면 129회 퇴장(129회에 두두을이 화장을 해주며 회고가 나온다.).

여담으로 작중 묘사되는 그의 아들들이 제대로 진상이다. 그나마 차남, 3남에 비해 장남이 비교적 정상인이지만 이쪽은 또 출생의 비밀과 엮인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막내 이지광으로 출연한 배우가 다름 아닌 하정우이다. 아내 최씨는 드라마에서는 비교적 좋게 나왔다. 무식하고 욕심이 많긴 하지만, 이의방이 몰락한 후에도 그의 가족을 도와주고, 처음엔 마땅치 않게 본 두두을이 황제의 꿈에 심취한 이의민과 갈등을 일으키고 떠날 때도 챙겨주었다. 이의민의 애첩을 죽인 일도 드라마에서는 둘재 이지영이 죽인 걸 자기가 스스로 뒤집어 쓰는 등 이지순과 함께 가족 중 개념인에 속하는 인물. 하지만 실제 역사 상에는 다른 가족들과 별 차이 없다...

  1. 무신정권의 네번째 집권자.
  2. 심지어 일부 백과사전에는 아직도 경주 이씨라고 적혀 있다.
  3. 정선 이씨 집안이 피란 동안 신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입장도 있으며. 어쩌면 상서를 지낸 2세손 이란과 6세손 이의민 사이에 무슨 변고로 신분이 하향된 것으로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
  4. 물론 이지순은 처벌은 받지 않았고 정작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이지순을 처벌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자결했다.
  5. 이의민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가장 먼저 내건 슬로건이 왕을 죽인 역적을 처단한다였다.
  6. 근데 말이 곧이지 심복들이 참살당한 시점은 밤이었고 몸이 포박된 건 아침이었다. 그리고 밤의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박진재와 최충수까지 합세하여 이의민을 공격하였다. 그래도 버티는 걸 보는 최충헌의 부하들이 질릴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