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헌단경황후 동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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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獻端敬皇后 棟鄂氏 (1639 - 1660)

순치제후궁. 속칭 동악비. 만주 정백기 사람으로 내대신 악석(鄂硕)의 딸이다.

18살에 입궁하여 순치제의 사랑을 독차지했고,[1] 순치 13년 8월에 '현비'(賢妃)라는 칭호를 받아 현비 동고씨(賢妃 棟鄂氏)라 불렸다. 그 해 12월 황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2] 그녀는 순치제의 뜻에 따라 육궁을 주관했고, 후궁 내 그녀의 위치는 실질적으로 황후나 다름없었다.

1657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순치제의 4황자 영친왕(榮親王)이다. 순치제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탄생하자 크게 기뻐했고, 황태자에 봉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약 3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고, 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현비 동고씨는 결국 천연두에 걸려 21살의 나이인 1660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현비 동고씨가 죽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 해 5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현비 동고씨의 뒤를 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순치제는 국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한 대신들을 물리치고 현비 동고씨를 황후로 추존, 효헌장화지덕선인온혜단경황후(孝献庄和至德宣仁温惠端敬皇后)란 시호를 내렸다. 또 수천 자에 달하는 동비행장(董妃行狀)을 직접 지어 그녀를 기렸다.

그녀와 순치제의 애틋한 로맨스는 매우 유명하여, 수많은 중국 사극들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청나라 초기를 다룬 사극들, 그 중에서도 순치제나 효장문황후가 나오는 작품이라면 그녀 역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

그녀가 사실 강남의 유명한 기생 동소완이었다는 야사도 있지만, 이는 사실무근이다.

또한 순치제의 이복동생 양소친왕(襄昭親王)[3]의 복진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전자와 달리 꽤 설득력이 있다고 평해지는 편이지만, 일단 정사에서 기록된 바는 없다. 이 설대로라면 순치제는 동생 마누라를 뺏아다 결혼한 것(...) 양소친왕 복진설을 미는 사람들이 대는 근거는 그녀가 입궁한 나이가 수녀 선발 이후였다는 점,[4] 양소친왕이 죽은 후로 책봉이 미뤄졌다는 점, 예의가 발랐음에도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태후가 싫어했다는 점[5] 등이 있다.

참고로 강희제를 도와 가르단 정벌에서 활약했던 대장군 피양구(費揚古)가 바로 그녀의 동생이다. 또 순치제의 후궁이었던 정비(貞妃) 동고씨는 그녀의 사촌동생인데, 정비 동고씨는 순치제 사후 순장당했다.
  1. 아담 샬 역시 순치제가 그녀에 대해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2. 청나라를 소재로 한 중드를 자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황귀비는 황후 바로 밑의 지위로 후궁 중에선 가장 존귀한 자리이며 한 명밖에 둘 수 없다. 황귀비들은 대개 후궁에서 수십 년 살면서 짬밥이 생겼거나 죽은 후에 추존돼서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 젊고 자식도 없던 그녀가 황귀비가 된 것이다! 순치제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
  3.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봄보고르(Aisin-gioro Bombogor, 愛新覺羅 博穆博果爾). 청태종 홍타이지의 11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차하르 릭단 칸의 아내였다가 홍타이지와 재혼한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씨(懿靖大貴妃 博爾濟吉特氏)이다.
  4. 황제나 황족의 부인이 되려면 수녀 선발을 거쳐야 하는데 이거 제한연령이 17세까지다. 수녀가 되어 양소친왕의 복진으로 뽑혔다가 황제의 부인이 된 거 아니냐는 점.
  5. 물론 사람이 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한둘이 아니고(...)효장태후의 조카인 황후를 놔두고 총애를 몰빵받았으니 싫어할 만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공사를 엄격히 구분한 인물로 자기 조카인 황후도 태도가 방자하다고 여러 번 혼낼 정도였다. 이런 인물이 개인적 감정이 안 좋았다고 공공연하게 티를 낸 것은 뭔가 이상하며, 비정상적인 경로로 후궁이 되었기 때문에 못마땅했다면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는 설이며 단순히 이례적일 정도로 총애를 받는 동고씨가 후궁의 세력균형을 해친다고 생각하여 싫어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