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루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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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스파냐 테르시오 시대의 마지막을 알린 전투 1643년 5월 19일 프랑스 북부의 로크루아 지방에서 일어났다.

2 전투의 원인

30년전쟁 중반기에 들어 반합스부르크 진영으로 직접 전쟁에 참전하게 된 프랑스[1]합스부르크 세력을 플랑드르에서 축출하기를 원했고, 반대로 에스파냐는 플랑드르와 카탈루냐 양면에서 전선을 형성해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3 전투 진행과정

3.1 전투 이전 상황

1643년 리슐리외의 죽음과 루이 13세의 와병으로 프랑스가 잠시 주춤한 가운데 새로이 플랑드르의 섭정으로 임명된 프란시스코 데 멜로는 프랑스 국경 요새인 로크루아를 포위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앙갱 공작(훋날의 프랑스의 명장 콩데 공 루이 2세, 흔히 대 콩데)이 로크루아 방면으로 기동하는 동안 결국 루이 13세가 붕어(=사망)하였지만 앙갱 공작은 군의 사기를 위해 장교진에게만 그 사실을 통지하였다.

로크루아로 가는 길목은 좁은 숲 골짜기여서 앙갱은 멜로가 그 길목에서 프랑스군을 차단한다면 짐과 대포를 후방에 놔 두고 숲을 관통해 로크루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멜로는 프랑스군보다 병력 면[2]이나 훈련도 면에서 앞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포위 섬멸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프랑스의 기동을 방기하였다.

로크루아 앞 평원에 전열을 정비한 프랑스군은 좌익에 늪지대를 낀 형태로 양익에 기병대를, 중앙에 보병대를 배치 하였고 에스파냐군 역시 비슷한 포진을 하는 한편 프랑스군 우익과 에스파냐군 좌익 사이에 있는 좁은 숲에 총병을 배치해 프랑스군 우익의 기동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3.2 전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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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아침에 프랑스의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의 좌익을 맡은 알부르케르케는 자신의 측면이 총병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 콩데에 의해 미리 제거되었기 때문에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붕괴하고 말았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좌익은 섣부른 공격했다가 멜로의 반격에 의해 패퇴되고 있었고 중앙 보병 역시 에스파냐의 보병대에 밀리고 있었다.

중앙을 구원하기 위해 앙갱은 에스파냐군 중앙을 향해 무모한 돌격을 시도했지만 에스파냐군 중앙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 앙갱 공작(대 콩데)은 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기병 기동을 성공시켜 프랑스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에스파냐군의 우익 배후에 등장하였고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에스파냐군 기병대는 모두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전장에 남게된 중앙의 보병대는 프랑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게 되었고 2선의 독일인, 왈롱인으로 구성된 보병대가 궤주했지만, 역전의 에스파냐 테르시오 방진은 프랑스군이 노획한 에스파냐군의 대포가 두들기는 가운데 이후 세차례나 이어진 기보 합동 공격에도 꿋꿋이 전장을 지켰다.

하지만 보병대를 지휘한 퐁텐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자 에스파냐 보병대는 대 콩데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대 콩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로크루아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3.3 전투 결과

이 전투로 1만 8천의 보병 가운데 7천 명이 포로로 잡히고 8천 명이 전사함으로써 보병대가 전력의 핵심이던 에스파냐군은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고참병과 지휘관의 대량 전사는 그렇지 않아도 정치-경제적으로 붕괴하던 에스파냐의 상황과 맞물려 에스파냐군은 그 위상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고 에스파냐 왕국의 운명 역시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4 기타 이모저모

영화 알라트리스테의 마지막 부분이 이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다만 원작의 소설적 각색을 따랐기 때문에 결말이 조금 다르다.
  1. 다만 프랑스는 반합스부르크의 일원으로 독일에서 프랑스의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이지 신교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웨덴과의 협상에서도 독일 내 가톨릭 교도의 보호를 요구하였다.
  2. 프랑스군은 보병 1만 5천에 기병 7천, 스페인군은 보병 1만 8천에 기병 8천이어서 병력 면에서의 우위는 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