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시오

Ter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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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테르시오의 깃발.

1 개요

16~17세기경 스페인의 보병 대형을 일컫는 말. 스페인 말로는 3분의 1을 뜻하는데, 이는 카를로스 1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나폴리, 시칠리아에 최초 3개의 테르시오가 편성되었기에 그렇게 이름붙여진 것이다.[1][2]

2 테르시오의 유래

테르시오는 15세기 말~16세기 초 스페인의 장군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대령 (coronel) 계급의 연대장 한 사람 밑에 다수의 장창병, 총병대, 검방 보병을 하나의 연대로 묶어 각 부대가 자체적으로 대기병, 사격전, 대보병 백병전, 등 다양한 형태의 전투를 모두 유기적으로 수행 할 수 있도록 군 편제를 새로 짠 것을 대령 연대장이 지휘한다고 하여 코로넬리아 (coronelía)라고 이름 붙힌 것에서 기원한다.

그는 그동안 검병과 투창기병들이 주축이 되었던 스페인군[3]을 이끌고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했다가 중무장한 기사와 스위스 장창병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4]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프랑스 군 등 서유럽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한 끝에 창안한 것이었다.

당시 서유럽이 중무장 기사, 장창병이 주축이 된 것과는 대조적인 부분인데, 그간 스페인군이 이런 식으로 무장한 이유는 그동안 스페인이 주로 상대한 적이 치고 빠지기를 즐기고 그리 중무장을 하지 않는 무어인이었기 때문이다. 레콘키스타는 대부분의 경우 체계적으로 조직 된 대규모의 군대들이 야전에서 회전을 벌이는게 아니라, 예를 들어 강 하나, 계곡 하나, 언덕 하나를 경계를 두고 무어인이나 기독교인 소규모 약탈 전문 병사들이 상대 마을과 주변 농토를 기습적으로 파괴하고 도망치는 식의 유격전으로 벌어졌다.

수백년의 레콘키스타 기간동안 그러한 경장의 적과 맞서싸우다보니 스페인군도 자연히 경장화 되었던 것. 또한 스페인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키울수 있는 목초지가 부족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사 계급의 발전이 미약했다. 투창기병들 또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전체 군병력에서 비중이 낮았으며, 애초에 히네테 (jinetes) 라고 불린 이 투창 경기병들은 위에 서술 된 게릴라 강습전, 추격 섬멸전, 물자 약탈 등의 비정규전에 특화 된 병과지 서유럽의 기사마냥 중무장 시키고 돌격하는 중기병이 아니었다. 저들 나라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열심히 이슬람 침략자들을 물리친 나라라고 자랑 하는거 좋아하는 것 치고 스페인은 무어인들에게 문화, 예술, 정치, 사회, 군사 등 다방면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워 왔는데, 승마술도 스페인 승마술은 지금까지도 덩치 큰 대형마들이 랜스 차징에 특화 된 중무장 기사들을 태우고 다니는 일반적인 서유럽식 승마술이 아니라 덩치는 작으나 몹시 유연하고 재빠르며, 한 순간에 폭발적인 속도는 못 내지만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아랍식 승마술에서 배워왔다.

따라서 스페인에선 어쩔 수 없이 보병이 전력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귀족계급에서도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는 보병이 중심이 되는 다른 이탈리아, 스위스, 스코틀랜드도 마찬가지였던 반면, 나라 전체가 말들 뛰어 놀라고 있는 대평원인 폴란드 같은 나라들은 대조적으로 17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계 국가에게서 체계적인 보병 운용 전술을 배워 오기 전 까지 비단 귀족 평민 상관 없이 전쟁은 당연히 (...) 말 위에서 하고, 보병은 뒤에서 대포나 만지는 아주 제한적인 역할이나 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인식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와 전쟁을 할때 스페인군의 중장기병은 거의 대부분 독일의 기병대였다.

3 테르시오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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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시오를 구성하는 병과는 아래의 4종류가 있다.

파이크병(영어-Pikeman/스페인어-Piquero) – 파이크(장창)을 갖고, 갑옷은 일부 혹은 전혀 장비하지 않은 창병.
코셀레테(영어-Corselet/스페인어-Coselete) – 파이크를 갖고, 갑옷과 투구로 완전히 무장한 창병.
아르카부스 총병(영어-Arquebusier/스페인어-Arcabucero) – 아르카부스(화승총)을 갖고 있는 총병.
머스킷총병(영어-Musketeer/스페인어-Mosquetero) – 머스킷 총을 갖고 있는 총병. 즉 이 당시 머스킷은 아르카부스보다 대형인 총의 호칭이었다. 머스킷이 축소되어 선입된 총 전반을 가리키는 호칭이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로델레로 검병(영어/스페인어-Rodeleros) - 방패로 무장한 검병. 총의 성능이 개량되면서 점차 총병으로 대체되었다.


대표적인 스페인 테르시오

기본단위는 중대로써 정원수는 250명 혹은 300명이었다. 대위 1명, 중위 1명, 중사 1명, 기수 1명으로 중대를 지휘하고, 그외 종자 1명, 보급계장교 1명, 고적수(鼓笛手) 1명, 종군사제 1명, 이발사 1명이 참가하였다. 장교를 포함한 중대 본부요원의 총 숫자는 11명이었다.

테르시오를 구성하는 중대에는 아래의 2종류가 존재했다(아래 기록은 병사수 250명을 기준으로 한 경우)

A – 본부요원 11명, 파이크병 108명, 코르스렛 111명, 머스킷 총병 20명
B – 본부요원 11명, 아르카부스 총병 224명, 머스킷 총병 15명

테르시오 1부대는 A중대 10개 + B중대 2개로 총 12개중대로 구성되어 있다.[5] 총 숫자는 3,000명 정도이고, 그 내역은 장교와 사무원 132명, 파이크병 1,080명, 코셀레테 1,111명, 아르카부스 총병 448명, 머스킷총병 230명이었다. 전체의 지휘는 대령(코로넬)이 맡았고, 그를 보좌하는 장교단(테르시오 전체의 본부요원)은 30명 전후였다.

다만 이것은 이상적인 완전편성의 숫자이고, 꼭 현실의 테르시오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1개중대의 병력수는 150명 정도인 경우가 많았고, 이상치의 절반인 1,500명 혹은 그 이하의 병력수로 구성된 테르시오가 대부분이었다
전투시 테르시오는 창병과 총병을 조합해 하나의 거대한 방진을 만들었다. 즉 창병이 종심 20열에서 30열 정도의 방진을 조직한다. 이 방진의 사방(四方)을 2열의 총병이 들어가 에워싼다. 이때 정면에는 위력이 큰 머스킷총병을 배치한다. 거기에 네귀퉁이에는 종심 4열에서 6열 정도의 총병의 작은 방진을 조직한다. 이로 인해 모든 방위에서 사각이 없는 방진이 완성되었다. 다만, 숫자는 완전한 정원수일 때 였다. 병력이 실제로 절반에 불과할 때는 이것도 분배가 필요했다. 또한 상황에 따라 종심의 깊이 및 횡렬의 길이는 적절하게 변경되었다. 전장에 배치된 테르시오의 최전방은 중갑주(重甲冑)를 갖춰 입은 정예 창병(코셀레테)을, 그 뒤에는 갑옷의 일부만을 입은 창병, 맨 뒷열은 갑옷을 입지 않은 창병(주로 신병)을 배치한다. 이러한 창병의 방진을 중심으로, 총병들은 적에게 사격을 가하다가 적들이 가깝게 접근하면, 창병의 대열 뒤로 숨었다.


이렇게 하여 적 기병대의 돌격을 창병이 저지하고, 화승총의 일제 사격으로 적의 예봉을 꺾은 다음에 다시 창병 공격으로 적을 궤멸시키는 이 전술은, 무엇보다 창병을 이용하여 재장전시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총병을 보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단순한 전술적인 정교함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의 군인들 또한 나라 자체가 오랜 전쟁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에 수반한 전사 계급을 숭상하는 문화 차원의 상무 정신이 곁들여 개별 전투원으로서의 자질 또한 당시 유럽 최강의 병사들이라 할 만했다. 이런 전술적 혁신과 더불어 레콩키스타 동안 축적된 노련한 지휘관들과 전투적 가톨릭 신앙으로 무장한 높은 상무 정신, 그리고 야전 병원, 보급 체계, 육해군의 합동 전술, 외교적 연줄을 통한 용병들의 적재적소적인 사용 등 전반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혁명적인 개선을 통해 스페인은 이런 전술적 이점을 장기적인 전략적 우위로 전환시킬 능력을 갖추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을 스페인은 당대의 기술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16세기~17세기 기준으로는 놀라울 만큼 높은 조직력으로 원하는 전장 적재적소에 투사하여 당대 최강의 육군국으로 부상하였다.

4 영향과 한계

결국 이러한 장창과 화승총의 조합으로 기사들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퀴러시어 기병대가 등장했다.

또한 네덜란드의 장군 마우리츠는 이 테르시오를 격파하기 위해 점점 발전하는 총기의 막강한 화력에 의존하는 선형진을 개발했다. 첫 실전 투입인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선형진을 짠 보병대도 스페인 테르시오들을 격퇴하지는 못 했고, 오히려 테르시오에게 밀려버리고 말았다.[6] 선형진이 완벽하게 테르시오를 격파한 것은 1631년의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되어서였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총기를 앞세운 선형진은 테르시오를 점점 압도했고, 스페인 테르시오는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증발시키는 기염을 토했지만 끝내 1643년에 벌어진 로크루아 전투는 테르시오들을 결정적으로 몰락시켰다.

또한 화포의 화력이 발전함에 따라 기존의 밀집대형은 오히려 떼죽음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결국 테르시오 대형은 점차 자연스럽게 해체되어 창병이 사라지고 대형도 밀집대형에서 선형 대형으로 바뀌어 전열보병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페인의 무적 전설이 종료된 로크루아 전투에서조차 "스페인 테르시오"는 붕괴되지 않았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프랑스 정예보병들을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기병대가 어이없이 패퇴하고 왈롱(벨기에) 테르시오가 달아나 고립된 상태에서도 대포를 동원한 프랑스군의 기병돌격을 4차례나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프랑스 지휘관인 콩데 공작은 스페인 테르시오가 깃발과 무기를 들고 전장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용했다. 한 시대 위에 군림했던 무적의 병과에 걸맞는 영예로운 퇴장이었다.

5 기타 이모저모

테르시오를 완벽하게 고증한 영화의 한 장면. 스페인 영화 알라트리스테의 마지막 장면이다. 위에 언급된 로크루아 전투를 다룬다. 영화상의 기병들이 카라콜(선회기동)하지 않는 사실을 들어 오류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지만, 카라콜 전술의 사용시기는 의외로 짧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쪽이 고증에 맞다. 로크루아 전투가 발발하기 이미 10년도 더 전에 스웨덴의 사자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실시한 군사개혁을 시작으로 기병교리는 다시금 충격력을 통한 돌파로 선회하였기 때문이다.

  • 영상에서 고증이 다소 부족한 장면은 프랑스와 에스파냐 양측의 창병이 격돌하는 장면이다. 상당수의 창병들이 창을 버리고 창대 아래로 기어가 근접전을 시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저렇게 많은 수가 근접전을 시도하진 않았다. 물론 근접전을 시도한 병사들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니 이 장면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영화의 박진감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제작진이 이정도로 고증덕후인데,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전투씬인데 창만 멀리서 푹푹 찔러대면 뭔 재미가 있겠는가.
  • 영상에서 기병들이 적이 아닌 하늘에 총을 쏘며 돌진하는데, 다소 이상해 보일 수는 있지만 고증에 충실한 연출이다. 당시 피스톨의 정확도와 사거리는 절망적인 수준이라,[7] 많은 기병들이 마구잡이로 하늘에 총을 쏘며 돌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맞지는 않더라도 위협의 용도로는 쓸수 있었기 때문. 또한 피스톨은 근접전에서 뒤집어 둔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머리판에 금속을 덧대기도 했으므로 돌진을 위해 굳이 번거롭게 무기를 바꿀 필요도 없었다.(단축키 하나면 무기 바뀌는 게임이 아니니까.)
  • 파이크의 실전적 사용법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굉장히 좋은 영상이다. "창대 밀기", "대기병용 창", 이어지는 근접전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3에서 대표적인 전근대 보병 병과로 등장한다. 방어력은 동시대 보병 중에서 최강으로, 일단 테르시오로 업그레이드하면 사상자의 숫자가 확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적 기병이 충격을 가하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병을 방어용으로 세우고 기병을 주 타격 수단으로 삼는다면 아주 쓸만하다. 그런데 마우리츠의 보병대가 같은 기술 레벨에 있는 점은 다들 잘못된 고증으로 여기고 있다. 이를 반영한 것인지 후속작인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병종을 좀 더 세분화하여 군사 테크 12에서 테르시오가 등장하고, 테크 15에서는 마우리츠 보병대가 등장하며, 테크 19에서 개량 테르시오가 등장하게 되었다.

  1. 혹은 초기 테르시오의 주요 병과였던 화승총병, 파이크병, 로델레로 이렇게 3개였던 것이 유래라고도 한다.
  2. 테르시오 내 이탈리아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출신 병사들 다음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질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 병사들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게 모집된 병사들이었다.
  3. 그간 수백년 동안 싸워온 상대가 경무장 위주인 이슬람군이었기에 스페인군도 그에 맞추어 방어력보다는 기동성을 중시하고 있었고, 성문을 따고 진입하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창보다 검과 방패가 선호되고 있었다.
  4. 사실 스페인군의 무장 때문이라기 보다는 스페인군의 투창기병이 시전하는 치고빠지기를 도주로 오해한 나폴리왕국군 동맹군이 뒤따라 도주해버린 탓. 그런데 당시 나폴리왕국군은 정규군이라기보다 의용병(당시 거의 전 국토가 프랑스군에게 넘어가고 나폴리 왕 페르디난드 2세가 스페인으로 망명.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 돌아왔는데, 왕께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든 민병대)이었던 관계로,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탓해도 충분했을 법한 패전이었음에도 문제점을 찾아내서 개량한건 좀 대단하긴하다.
  5. 병사 300명의 경우 A중대 8개, + B중대 2개로 총 10개 중대.
  6. 다만 이 전투에서는 네덜란드군이 승리했다. 왜냐면 테르시오가 선형진을 거의 다 붕괴시키자 스페인 병사들이 성급하게 이겼다, 전투 끝이라고 판단하고 전리품 챙기겠다며 흩어지면서 테르시오의 대열이 먼저 해체되었기 때문 (...)
  7. 당대 피스톨의 살상력에 대해서는 유명한 경구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피스톨이 상대의 몸에 닿으면 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경구를 지켜도 상대가 반드시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