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비 전쟁

1 개요

기원전 167-142년까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유대는 잠시동안의 독립왕조인 하스모니안 왕조를 창설하게 된다.

성경에서는 제2경전으로 역사서의 마지막부분을 차지하는 마카베오 1서와 2서에서 유다 마카베오의 투쟁부터 시작해 이 전쟁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마카베오 1/2서는 상/하권 관계가 아니라, 다른 편집자가 각각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본 별개의 문서이다. 제2경전이 없는 개신교에서는 '신구약 중간기'로 분류한다.

2 전개

2.1 전쟁 이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복이후 헬레니즘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유대인들의 전통종교와 대사제장을 중심으로한 신정정치체제를 용인해주었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광대한 제국은 그의 부하장수들간의 쟁투로 갈라지게 된다.(디아도코이)

이집트를 점령한 프톨레마이오스는 팔레스타인도 점령하고 유대를 통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매년 20탈란트의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대사제장을 중심으로한 신정정치의 자치권을 용인했다. 이때까지는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한때 대사제장 오니아스3세가 매년 바치턴 20탈란트의 세금을 바치지 않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유대의 자치권 박탈을 위협했으나 토비아 가문의 요셉이 밀린 14년치 세금을 몽땅 내버려서[1] 자치권 박탈을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예술을 좋아하긴 했으나 군사적 능력은 별로였던 그의 대에 이르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고 이틈을 노린 시리아를 점유하고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기원전 200년, 안티오쿠스 3세가 파네이온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격파하여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티오쿠스 3세는 여기저기 정복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했고 결국 거액의 전쟁배상금만 남긴채 기원전 187년에 암살되었다. 이후 안티오쿠스 3세의 동생인 셀레우코스 3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안티오쿠스 3세의 전쟁배상금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한 끝에 예루살렘 대신전의 금고를 탈취하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셀레우코스 3세의 생각에 대해 시리아 총독 헬리오도루스는 이건 미친짓이야라면서 예루살렘 대신전 금고약탈을 중단했고[2] 결국 셀레우코스 3세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안티오쿠스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헬리오도루스를 격파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대인들에게는 악몽이 시작되었다.

2.2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 강제

젊고 자신만만했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교와 전통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아니꼽게 여겼고 이는 강제적인 헬라화 정책 강행으로 이어졌다. 우선 그는 자신이 제우스신의 현현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신의 현현)으로 칭하고 숭배하게 했으며,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돼지고기를 먹을것이며, 사내아이들의 할례를 금지하고,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던것.

이런 조치는 유대교에 충실한 유대인들에게는 악몽같은 소리였고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반면 헬레니즘 문화에 유화적이던 유대인들은 이 조치에 그다지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유대교에 충실하고자 한 유대인들과 헬레니즘 문화에 유화적이던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충돌했고 이는 마카비 전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조치를 내리고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한편 유대에서는 보수적이던 대사제장 오니아스 3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동생 야손이 대사제장이 되었다. 야손은 형과는 달리 헬레니즘 문화를 아주 좋아했으며 안티오쿠스 4세에게 앞장서서 헬레니즘화를 다짐할 정도였다. 야손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헬레니즘 도시로 바뀌어나갔다. 그는 예루살렘에 체육관(김나지움)을 세우고[3] 전통적으로 대사제장과 율법에 정통한 원로들을 중심으로한 원로회를 일반 그리스 도시들같은 시민의회로 바꾸었다. 이런 조치들은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샀다.

그러나 야손은 불과 2년만에 시몬, 그리스식 이름으로는 메넬라오스라는 성전수비대장의 형에게 쿠데타로 쫓겨나고 만다. 야손을 쫓아낸뒤 메넬라오스는 토비야 가문의 지지를 받아 안티오쿠스 4세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사제장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메넬라오스는 사독계열도 아니었으니 더 막장으로 치달은셈.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헬레니즘화를 더욱 밀어붙였으며 안티오쿠스 4세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대신전의 기물을 내다파는 일까지 벌였다.

이런 가운데 안티오쿠스 4세는 기원전 168년에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오게 된다[4] . 이집트에서의 패배로 재정이 궁한데다가 짜증이 폭발했는지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으로 대뜸 쳐들어 와서는 더 강경한 헬레니즘 정책을 발표했다. 유대교의 토라(율법책)을 모두 압수해 불태우고 예루살렘 대신전에 제우스상을 세웠으며[5] 대신전에 돼지를 들고가서 돼지피를 벽에 발라 대신전을 더럽히는초딩같은 행위를 하고 대신전의 금고와 기물을 약탈하는 사태를 일으키고 돌아갔다[6].

한마디로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들에게는 유대교 말살정책인 이런 사태에 팔레스타인의 정세는 점점 험악해져갔다. 하시딤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헬레니즘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격한 갈등에 빠졌으며 결국 이는 마카비 전쟁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3 마카비 전쟁의 발발

기원전 167년, 모디인에 안티오쿠스 4세의 사자가 도착했다. 왕의 사자는 헬라식 제의를 하라고 강요했는데 대사제 요하난의 아들 맛다디아는 이를 거부했다. 다른 유대인이 헬라식 제의를 하려고 나서자 맛다디아는 그 자리에서 그 유대인을 쳐죽였으며 왕의 사자도 척살하기에 이르렀다.

맛다디아의 이런 행동은 사실상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선언과 다를바가 없었다. 맛다디아는 자신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유대광야로 나가 반란군을 조직하고 헬레니즘적 유대인들에게 맞서 싸울것을 결의했다. 여기에 하시딤들이 가세하면서 반란군의 기세가 오르게 된다.

2.4 유다 마카비의 대활약

그러나 기원전 166년, 맛다디아가 전사하고 반란군은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가 이끌게 된다. 그는 마카비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는데 마카비라는 이름은 유다가 전투를 시작할때 미 크모카 벨림 야훼!(어느 신이 당신과 같겠습니까 야훼여: 출애굽기 15장 11절)에서 각 단어의 앞단어를 따와서 만들어졌다. 로다주?

망치라는 별명답게 유다 마카비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마카비 군대는 팔레스타인 각 도시들을 공격하여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살해했다. 이는 마카비 전쟁이 헬레니즘파 유대인들과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맞서는 내전과 독립운동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에 격분한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은 이들에 맞서서 시리아의 군대장관 리시아스에게 협력하여 마카비 군대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유다 마카비는 벧호론,엠마오,벧주르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들을 연전연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결국 기원전 164년,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신전에 세워져있던 제우스상을 파괴하고 대신전을 정화했으며 유대교의 전통 의례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때 야훼를 위하여 켜는 성스러운 촛대의 성유가 하루치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이 되었는데 성유를 전례에 따라 만들려면 8일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은 하루치의 성유가 8일동안 타오르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 기적으로부터 유대교의 최대 절기인 하누카(수전절, 修殿節)이 유래되었다.[7]

2.5 전쟁 중반

같은해에 안티오쿠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안티오쿠스 5세가 즉위했다. 안티오쿠스 5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지라 리시아스에게 의존했고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안티오쿠스 4세의 강경한 유대교 정책에서 완화된 정책을 취했다. 우선 원성을 사고 반란의 주원인을 제공했던 대사제장 메넬라오스는 경질되고 사독계열이자 헬레니즘파인 알키모스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했으며 유대교의 전통 의례도 다시 허용했다.

하지만 유다 마카비는 이런 유화정책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대사제장 알키모스가 헬레니즘에 유화적인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져 알키모스 타도를 선언했다. 이렇게 되자 리시아스가 다시 마카비 군대 토벌을 위해 나섰고 한때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있던 리시아스의 정적인 필리포스가 시리아로 쳐들어오자 급히 철군해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이후 안티오쿠스 5세와 리시아스가 안티오쿠스 5세의 조카이자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에게 암살되었고 왕위는 데메트리오스에게 넘어가 그는 데메트리오스 1세가 되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알키모스를 지지하며 페니키아의 행정장관 바키데스를 파견했다. 알키모스와 바키데스는 평화적으로 유다 마카비와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으나, 유다 마카비가 게릴라전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결국 데메트리오스 1세는 반란군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니카노르 장군을 보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니카노르는 그야말로 파상공세를 펼쳤으나 벧호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다시금 마카비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니카노르의 전사이후 얼마간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기원전 160년에 베레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다 마카비가 전사하여 마카비군의 기세는 떨어지고 최대의 위기를 맞기에 이른다.

2.6 전쟁후기: 요나단의 외교전과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립

유다 마카비의 전사이후 바키데스는 마카비 군대를 완전히 토벌하여 반란을 종식시키려 하였으나 유다의 뒤를 이은 막내동생 요나단은 반란군을 유대광야로 퇴각시켜서 반란의 불씨를 이어나갔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유다 마카비와는 달리 요나단은 뛰어난 외교감각으로 유대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요르단강 동편의 나바테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심지어는 멀리 로마까지 사신을 보내 동맹관계를 구축했다.

또한 요나단은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맞서는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와 친분을 만들고 그에게 충성하여 종래에 대사제장이 되는것을 노렸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발라스가 데메트리오스 1세를 물리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권을 거머쥐기에 이르렀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딸과 혼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발라스는 자신에게 충성한 요나단을 결혼식에 초청하여 왕의 친구로 부르며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에게 보라색 옷을 입히고 시가 행진을 하게 했는데 이는 사실상 요나단을 유대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요나단에게 유대의 통치자라는 직함을 내리기에 이른다.

기원전 152년, 요나단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스스로 대사제장의 예복을 입고 초막절 전례를 주관하여 유대의 왕이자 대사제장을 겸하여 권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요나단은 사독 계열이 아니었던데다가 왕과 대사제장을 겸한것때문에 나중에 이는 유대교의 종파별 분열을 불러오게 되었다.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변동에 따라 적절한 외교술로 유대의 독립을 얻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는 정정이 불안했고 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빠질 우려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발라스가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패배하여 왕권을 빼앗기자 요나단은 바로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붙어서 사마리아 지역의 통치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2세 휘하의 장군 트리포는 반란을 일으켰고 요나단을 제거하여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려 했다. 기원전 143년, 벧산에서 요나단과 맞붙은 끝에 그를 붙잡기에 이른다. 요나단은 결국 옥중에서 트리포에게 처형되었다.

이후 마카비군은 시몬이 승계하게 된다. 시몬 또한 지도력을 발휘해 유대의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애썼는데 트리포에 맞서서 데메트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데메트리오스 2세는 세금면제의 특전을 주었다. 결국 기원전 142년, 시몬은 유대인의 대사제장,지도자,총사령관의 직위에 올라 사실상 유대의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시몬은 유대의 왕으로서 그의 자손들이 79년간 하스모니안 왕조를 이어나가게 된다.

2.7 전쟁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가 성립되긴 했으나 유대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모두 인정한것은 아니었다. 맛다디아의 반란 시작때는 경건한 유대교 전통을 지키기 위한 데서 시작했으나 요나단과 시몬에 이르러서 유대의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이들의 행태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방식에서 점점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의 행태로 변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요나단은 대사제장이 되기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에게 고개를 숙였고 사독계열이 아닌 그가 대사제장이 되면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크게 실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시몬까지 왕과 대사제장을 겸하면서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은 진정한 사독계열의 대사제장이 나타날때까지 다른 대사제장은 인정할수 없다는데에 이르렀다. 이들이 이후 종말론적이고 금욕적인 에세네파로 이어지게 된다.

하스모니안 왕조가 성립된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의 왕들은 왕이면서 동시에 대사제장을 승계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 행태는 헬레니즘적이었고 특히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전 세계를 정복해서 모든 사람들을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으로 만들겠다라는 턱없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병에 걸려있었지만 정작 그는 유대교의 분열만 가속화 시켰다. 결국 하스모니안 왕조는 유대교의 분열속에 심각한 왕위다툼까지 이어지다가 왕위를 위해 외세인 로마를 부른 극단적인 선택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
  1. 이전 주석에서는 1탈란트가 오늘날 기준으로 금 33kg정도에 해당된다고 보았지만, 고대 근동은 은본위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탈란트는 6000드라크마은화 혹은 은 3000셰켈로 은 34.272kg이다. 즉 유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바친 세금은 대략 은 685.44kg이다. 순은 1kg의 오늘날 시세는 대략 63만원 정도이니 유대가 바친 세금은 매년 4억 3182만 7200원 정도인데 이것이 14년 밀렸으니 세금이 대략 60억 4558만원 연체된 셈이라 볼 수 있다. 이전 주석의 금(...)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금액이지만 이만큼의 돈을 융통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토비아 가문의 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2. 사실 헬리오도루스의 생각이 옳은게 예루살렘 대신전의 금고약탈 사실이 동방 전역에 퍼진 유대인들에게 알려지면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수도 있었다고 봤을것이다.
  3. 고대 그리스에서 체육관에서는 다들 나체로 운동을 해야하는지라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악의 소굴이나 다름이 없는 시설이었다. 한편 나체 상태에서 할례의 흔적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도로 재수술(…)을 하는 친헬레니즘 유대인들도 있었다고.
  4. 일화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 중 이집트를 섭정 중이던 로마가 대사를 보내 안티오쿠스 4세를 대면하게 했는데 로마의 대사는 안티오쿠스 4세가 있는 곳에 원을 둘러 그린 후, "철군인가, 아니면 진군인가? 원 밖으로 나오기 전 선택하라."고 했다 한다. 진군을 택하면 로마와 선전포고를 하는 셈이니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5. 유대인들은 파멸의 우상이라 불렀다. 후에 예수가 예루살렘 대신전에 멸망의 가증한것이 선것을 보거든 종말의 때가 왔음을 알라라고 하는 말도 이때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걸로 보인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칼리굴라도 예루살렘 대신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6. 유대인들을 엄청나게 경멸하는 행위들이면서 능멸하는 행위이다. 대신전(유대인들이 부르기로는 대성전)은 유대인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여기는 장소로서 들어가기 전 제사장들은 반드시 손과 발을 전 밖에 비치된 대야에서 씻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을정도로 신성한 곳이었다.
  7. 하누카는 기슬래월 25일, 양력으로는 12월 25일에 지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