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황제 한무제 치세에 벌어진 후계자 관련 분쟁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무고는 없는 사실을 일러바치는 誣告가 아니고 巫蠱. 그러니깐 짚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 등에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머리카락 붙여놓고 바늘로 찌르는 따위의 행동을 뜻한다.
기원전 91년, 이 해 초 위자부의 언니 위유와 승상 공손하의 아들인 태복 공손경성(公孫敬聲)은 군비 19만 전을 횡령했다가 적발된다. 당시 황후 위자부는 무제의 사랑을 잃은 상태였는데 무제는 이 기회를 틈타 위황후 세력을 축출한다. 대장군 위청은 15년 전인 기원전 106년에 이미 죽었지만 위항 등 그 아들들은 한 차례 좌천을 당한 후에도 여전히 권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공손하는 당시 유명한 도적 주안세(朱安世)를 잡으면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빌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공손하는 어렵지 않게 주안세를 잡았지만, 주안세는 영악한 자로 무제가 어떻게든 위씨 세력을 청산하고 싶어함을 알고 오히려 무제에게 공손경성이 위황후의 딸들 양석공주(陽石公主), 제읍공주(諸邑公主)와 사통하고 황제를 저주했다고 고발한다. 무제는 대노해 공손하 부부와 아들들을 처형하고 자신의 딸들인 양석, 제읍공주도 자결시키면서 여태자 유거의 자리가 위태해지기 시작했다. 유거는 위자부의 아들이기 때문.
그러던 어느 날 무제는 나무인형들이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때리는 꿈을 꾼다. 무제가 놀라 주변을 뒤져보게 했더니 자신이 자주 다니던 감천궁 길 아래 잔뜩 묻혀있던 저주된 나무인형을 발견한다. 수형도위(水衡都尉)에 있던 강충(江充)의 조사 결과, 이 사건은 자기 외척들이 숙청된 후 황제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태자 유거의 짓으로 판명되었는데, 문제는 강충은 유거와 원한을 산 일이 있었고 이 기회에 여태자를 쳐내려는 목적으로 흉노족 무당과 짜고 이 사건을 벌였다는 것.
여태자 유거가 강충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또 무제가 자신을 의심한 것을 알고 무제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고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살해하자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했다.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관군과 대항하였으나 패배해 자결, 여태자의 후궁 사양제 역시 자결했다. 뒤에 반군을 이끌던 손자 유진 내외 역시 자살하고 반군은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거와 태자빈 사(史)씨, 유거의 아들이자 훗날 선제가 되는 유병의 아버지인 유진 내외가 자살한다. 그리고 유거의 어머니 위황후(위자부)가 폐위당하고 자결, 위청의 아들 위항이 사망하는 등 그 대단했던 위씨 가문이 싹쓸이되었다. 한무제는 이후 진상을 알고 강충을 죽였으며 이 일을 후회했다고 하나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