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역대 황제 | |||||
6대 경제 유계 | ← | 7대 세종 무제 유철 | → | 8대 소제 유불릉 |
파일:Attachment/한무제/무제무제.jpg | ||
묘호 | 세종(世宗) | |
시호 | 효무황제 (孝武皇帝) | |
성 | 유(劉) | |
휘 | 철(徹) | |
출생지 | 장안 미앙궁(未央宮) | |
사망장소 | 장안 미앙궁(未央宮) | |
아버지 | 유계(劉啓) | |
어머니 | 왕지(王娡) | |
생몰기간 | 음력 | B.C 157 ~ 87 (71세) |
재위기간 | 음력 | B.C 141 ~ 87 (55년) |
목차
1 개요
중국 역사상 가장 황제다운 모습을 남긴 군주 [1]
한나라의 7대 황제. 흉노를 토벌하고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굵직한 업적들이 꽤 있어 중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언급이 많이 되는 황제이며, 한국사에서도 고조선 멸망시켰기에 꽤나 언급되는 편이이고 마찬가지로 베트남사에서도 남월을 멸망시켰기에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관료체계를 완비하며, 염철전매법, 균수법, 평준법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 무제의 정책은 후한 이후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끼첬으며 유학 또한 그의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선다.
그러나 또한 소모적이고 거대한 대원정을 일으키고, 마찬가지로 큰 규모의 토목공사를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낭비된 재정확보를 위해 증세와 세금 신설을 단행해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였다. 또한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사마천을 고자로 만들기도 하였고 본의는 아니지만 괴철의 이름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중국 최초의 연호를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한 인물.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가 있으나, 그보다는 진황한무가 더 많이 쓰인다. 그만큼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한 인물이다.
2 황제가 되기까지
원래 한무제는 부황 경제(景帝)의 11번째 아들[2]로 교동왕(膠東王)이었다. 경제는 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적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인 왕 미인은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인 관도장공주의 딸 진교와 유철을 혼인시킨 후 장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장공주는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황태자 유영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 아마도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장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던 듯 하다. 그 와에 경제가 자신이 죽으면 율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결국 진교는 유철과 결혼하였고, 이 과정에서 금옥장교[3]의 고사가 생긴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 미인과 장공주의 공작의 결과 유영은 폐위당하였다. 이후 경제는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했으며 황태자 폐위를 반대한 주아부를 유사하게 했고, 유영의 스승이자 두 황후의 조카며 역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두영은 중임을 맡기지 않았다. 한편 황태제를 노린 동생 양 효왕 유무는 비록 어머니의 편애 때문에 대놓고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입조를 막는 등 냉대했다. 그 후에야 유철, 한무제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한무성세(漢武盛世)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공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즉위 초에는 할머니 두태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두태후의 일족을 숙청해버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한무제는 절대로 유학을 국가 전체의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는 문경지치를 포함하여 상당부분 도가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문제의 비였던 두태후는 이러한 통치체제를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무제는 오히려 법가적 성향을 아주 강하게 드러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인 순리와 가혹하게 다스린 혹리를 각각 별도로 다루고 있는데, 이 가혹한 법가적 관리인 혹리들의 상당수는 바로 한무제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육가와의 문답을 통해서 유교를 한나라에 받아들인 한고조의 목적이 유교 이념으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위 아래가 없었던 초기 조정의 위상을 잡기 위한 것처럼, 한무제가 동중서의 제안을 체택한 것도 문경지치의 도가적 지침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한무제는 유교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실제로는 법가적 통치를 하였고, 이 모든 통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다만 진시황의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한나라의 특성상 법가의 이름을 대놓고 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내놓은 것이 바로 유교였다. 이후 전한 시대에도 유교는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원제가 유학에 심취하기 시작한 이래[4], 왕망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교논리가 국가의 통치논리와 합일되기 시작한다.
위청, 이광, 곽거병 등의 명장들을 파견해 한고조 시절부터 한과 대립하던 흉노족을
개박살내고, 남월과 조선을 정복하고,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원래는 흉노에 맞설 동맹을 구하려 했던거지만...)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했다. 또한 한 무제 당대까지도 이민족 국가의 영역이었던 푸젠 성과 저장 성 일대(민월과 동월이 위치해있었다. 명목상으로 한나라의 제후국이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도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를 중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킨것도 한무제의 공이다. 한무제의 중요 업적인 흉노 원정에 대해서는 위청, 이광, 곽거병 항목을 참고하고 조선 정복에 대한 내용은 왕검성 전투 항목 참고.
또 둔전제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4 한무성세의 그림자
한무성세라는 말이 존재하면서도 한무제가 후대 사람들에게도 까임의 주 대상인 것은 한무제 본인과 한무제 통치기에 나타났던 문제점들이 너무나도 심각하고 명백하기 때문이다.
4.1 토목공사
한무제의 화려한 군사원정과 로망을 자극하는 기린아 곽거병의 원정기는 후대사람들에게 한제국의 강대함과 위대함을 칭송하게 하며 한무제-곽거병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하지만 한무제 당시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성들을 고통의 나락에 밀어처넣어주신 폭군이다. 문제, 경제시대부터 이어진 '곡식이 썩어나고 창고에는 온갖 재화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박살낸 원수에 가깝다. 즉위 초의 백성을 위해 베풀던 선정의 시절은 할머니인 두태후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 대부분이며, 두태후가 죽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폭군으로서의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능을 일찍 건설하는 것 자체는 그 당시의 황제라면 당연히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규모를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 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기린아 곽거병의 우주를 뚫는 화려하고도 찬란한 대군을 이끈 군사 원정은 한제국의 국고를 아낌없이 탈탈탈 털어주셨는데 여기에 추가로 한무제 본인의 토목공사들이 겹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하였다. 게다가 곽거병의 군사원정이 한제국의 엄청난 재정 낭비 부담을 덜어줄 추가적인 재정마련의 일환이 된것도 아니였다. 사실상 한 제국의 등골브레이커
4.2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흉노를 격퇴했지만,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하고,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심한 상업 통제로 부유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으로 이 점은 사마천이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 이 정책은 이렇게 상업의 발전을 억누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5] 무제 사후, 이 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이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이때 술의 전매제도는 폐지됐지만, 소금과 철은 무제시기의 전매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정쟁은 국가 정책의 대립인 동시에 고명대신[6]들의 권력투쟁의 장이었고, 소제는 내조의 수장인 곽광의 손을 들어주었다.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관걸과 상홍양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연왕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들키고 말았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비롯한 일족이 모조리 멸족을 당했고 균수, 평준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정책들은 곽광의 측근인 두언년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사실 따지고보면 이런 염철의 국가개입과 경제정책의 국가주도는 이미 제환공 시절 관중이 시행했을정도로 유서가 깊은 것이었고 후대 중국왕조, 한국왕조들도 사용해왔으며 현대 중국마저도 2010년대에 들어서서 더 이상 소금을 국가가 이용하는게 국가 재정과 소금업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야 폐지했을 정도로 오랜기간 사용되어 왔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한무제의 지나친 씀씀이 때문이었는데 이런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고 무제 자신은 구난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다. 문제는 구난사업을 펼쳐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입힌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불만 달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
토목공사에서 언급되었듯이 곽거병의 흉노원정은 한제국의 국가재정에 기여분은 그냥 병아리 눈꼽조차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머나먼 원정을 성공한 기린아 곽거병의 군대의 공을 치하하는데 아낌없이 상을 듬뿍듬뿍 내려줬기 떄문에 한제국의 재정상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4.3 신하에 대한 원칙없는 대우
또한 한무제는 신하들을 대우할 때 심각한 인지부조화의 성격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이릉과 사마천이다. 이릉은 해당 항목에서 나오듯이 소규모 병력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펼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트린 것에는 무제 본인의 책임이 컸다. 그럼에도 분노한 한무제는 소식을 전하러 왔던 이릉의 부하 진보락의 책임을 물어 자살하게 하였고 평소 이릉과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는 감히 이릉을 변호하고 같이 출정한 이광리[7]를 폄하[8]했다는 이유로 처음엔 사형, 그 뒤엔 궁형으로 바꾸어서 처벌해버렸다. 이후 다시 후회하였는지 이릉 구출 작전을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이릉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헛소문을 듣고 경솔하게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다.[9] 실질적인 책임은 무제 본인에게 있음에도 피해자와 이를 변호한 사람을 도리어 처벌한 것. 이 이릉과 사마천 이야기는 한무제의 성격을 비판할 때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한무제가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신하들에 대해서 가혹한 군주였고 이 정도의 인물 발탁은 다른 군주들도 그럭저럭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곽거병, 곽광 형제나 위청, 이광리 같은 인물은 무제의 인척이었고...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는 애매한데 '박사'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각국에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진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고 진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이것이 오경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로 이루어졌고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고,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졌으며 이로서 유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4.4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
게다가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더구나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오의 손권처럼 모함에 넘어가 자신의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를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한다. 무제는 구익부인을 총애하여 그 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 유불릉을 낳았는데 태자를 바꿀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의 태자를 싫어헸던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에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을 살해했으나, 이런 행동은 엄연히 무제에게는 모반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과 호위 군사와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일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진노한 무제는 군대를 파견해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태자는 장안 내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킨다고 선포했고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게 했다. 태자는 장안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군사로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승상 유굴리[10]와 5일간 혈전을 벌였다.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했다는 말을 듣자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안 태자는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무제는 명을 내려 위황후의 인끈을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은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결코 모반은 아니라며 사면을 요쳥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태자는 민간에 도망쳤으나, 결국 발각되자 자신의 비인 양제 사씨와 함께 자살했다. 뒤이어 잔당을 이끌던 여태자의 아들이자 무제의 손자 유진과 그의 아내 왕씨 내외 역시 자살하고 반군은 진압되었다. 그 후 태자의 모후 위씨 일족과 태자의 친지들도 숱하게 처형됐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 아기였던 유순(劉詢), 훗날의 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사망하고 폭군 창읍왕을 쫓아낸 원로 대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여태자보다도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막내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삼았다.
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사건은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도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의 건축을 명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의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가 실의에 빠졌고 흉노 정벌의 명장인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흉노족 태자 출신인 김일제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 B.C 87년 세상을 떠났다.
5 후일담
한국 조선의세종은 "대체로 인간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와 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비판했다.
한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은 지금까지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데 전술했듯이 국고를 탕진해 만든 만큼(...) 굉장히 크고 아름답다. 전한이 멸망하고 일어난 적미군이 무릉의 부장품을 꺼냈지만 전부 꺼내지 못했으며 서진 말기 민제 사마업은 자금이 없자 무릉을 털어 확보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담으로 이 무덤을 가지고 환빠들은 이것은 사실 고조선의 피라미드이며 중국 정부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나, 그 근거는 없다. 참고 - 한무제의 능묘인 무릉(茂陵, 일명 서안 피라미드)
국가의 번영은 절정을 달렸으나 대규모 원정 등에 의한 국가 재정 피폐 등 서서히 안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청나라 건륭제 시기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6 대중매체
한무제를 소재로 중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제목은 <한무대제(漢武大帝)>. 중국의 여섯 방송국이 연합해 3년간 제작했으며 66억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한다. 총 58부작. 감독은 옹정제를 다룬 드라마인 <옹정왕조>의 감독을 했던 호매.한무제 역은 유명배우인 진보국으로 작중에서 가공할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드라마 내내 소년 시절부터 판단력이 혼미해져 태자와 대립하는 등의 노년기의 모습까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첫화의 첫 장면은 말년의 한무제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고 사마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여기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은 그대가 쓴 책을 보았다. 너는 짐이 너를 죽여버리기를 바라겠지. 천추만대가 모두 너의 충성과 절개를 찬양하고, 짐을 폭군이라 욕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너는 이 책을 가지고 가도 좋다... 어떤 이들은 짐에게 너의 책을 태워 버리라고 말했지만, 짐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짐이 너의 책을 국가의 정사로 삼을 수는 없지만 한 사관의 말로 남길 것이다."
멋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애초에 사마천을 고자로 만든 것도 한무제고, 사마천의 최후 중 현실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다시 한번 황제를 비판했다가 처형당한 것의 실행자가 한무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마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병주고 약
삼국전투기 비류 전투 1편에서 흰 수염기른 유비의 모습으로 딱 한컷 등장하여 한의 변군(대방군, 낙랑군)에 대해 설명했다.올리기주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 한무제는 업적도 뛰어났지만, 폐해도 상당한 황제이기 때문에 폭군이라고도 명군이라고도 말하기 진짜 애매한 상태. 당장 한무성세조차 한경제의 업적을 한무제가 눈치없이 날로 먹겠다고 끼어들기한것이라는 비판이 많지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폭군적 면모와 명군적 면모가 공존한 인물들이 많아서 넘어가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만 해도 그리스로 주변 세계를 정복했기 때문에 엄청난 위업이 과오를 가려서 그렇지. 정말 강력한 제국에서 태어나 사방을 정복했다면 한무제처럼 까였을 가능성이 크다.
- ↑ 한서 제후왕전에서 10번째로 나오기 때문에 10남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11번째로 나오는 광천혜왕이 한서 경십삼왕전 중 광천혜왕전에서 무제의 형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광천혜왕과 무제의 순서만 바꿔보면 11남이 된다. 12번째로 나오는 교동강왕은 대놓고 한무제의 동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11째 밑으로는 가지 않는다. 결국 이복형보다 왕에 봉해진 순서가 먼저라는 건데, 광천혜왕의 어머니가 한무제의 어머니의 동생으로 지위가 낮아서 그런 듯.
- ↑ 내가 커서 교와 결혼한다면 나는 금과 옥으로 지은 궁전에서 교를 살게 하겠다..라고 한무제가 그랬다. 물론 나중에 진황후를 폐후한 걸 생각하면 안습하다.
- ↑ 한선제는 태자가 유학에 심취한다는 말을 듣고는 나라 말아먹을 짓이라고 굉장히 짜증냈다.
- ↑ 위안싱페이 저, 장연 역, 《중국문명대시야 1 (中华文明大视野)》
- ↑ 내조의 수장인 곽광, 외조의 수장인 상관걸과 상홍양, 그리고 김일제. 김일제는 소제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 ↑ 한무제가 총애했던 이부인의 동생.
- ↑ 사실 이게 더 메인이었다.
- ↑ 이 소식을 들은 이릉은 분노하여 정말로 흉노에게 전향, 흉노의 장군이 되버린다.
- ↑ 혹은 유굴모. 일단 위키백과에서는 유굴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름인 劉屈氂에서 氂는 "모"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