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리그의 심판
후보: 미스 포츈
날짜: CLE 20년 8월 31일
관찰
미스 포츈이 실크 블라우스를 걸친 건강미 넘치는 몸매만큼이나 당당한 태도로, 그 무엇도 거칠 것 없이 보무도 당당하게 대전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대양의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빼곤 그 어떤 건물에 들어가든 갑갑함을 느끼는 그녀다. 포츈은 발로란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이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그려내는 장관을 애써 재현해 놓은 우묵한 천정의 금박 장식을 경멸의 눈빛으로 쓱 훑어본다. 선장 지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삼각 모자가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못마땅해서 고개를 저은 것을 눈치챌 수 없었을지 모른다. 모자 아래로 풍성하게 드리워진 새빨간 머리카락이 어깨를 부드럽게 덮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뭍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타고난 강렬한 매력이, 어쩌면 허리에 차고 있는 금박으로 장식된 커다란 구식 소총보다 더 강력한 무기인 것 같다.
미스 포츈은 타일 바닥을 가로질러 경쾌하게 걸음을 옮긴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매력적인 몸매가 더욱 돋보여, 누구라도 이 모습을 보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도 남을 게 뻔해 보인다.
고개를 드니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사라는 미소라도 짓는 것처럼 입꼬리를 약간 실룩거리더니, 묘하게 우아한 동작으로 총집에서 소총을 꺼내 손가락으로 빙그르르 돌리고는 "적"이라는 글자를 조준한다. 그리곤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여 '빵'하고 속삭이고는 총을 다시 총집에 넣는다. 그 이상은 더 지체하지 않는다.
회고
미스 포츈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서 어둠 속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닌가. 리그가 심판에 검은 연기 따위 얕은 술수를 쓸 줄 알았다면 상륙 따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발밑이 푹 꺼졌다. 몸을 움츠리려 해 봤지만, 사방에서 몸을 압박하는 익숙한 압력이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려 벌린 입에서 소리를 삼키며 물거품이 대신 나왔다. 이거 지금 물 속이야? 미스 포츈은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뭔가 단단한 걸 붙들려 애썼다. 저 멀리 위에서 수면이 빛을 반사하며 춤추는 게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맹렬히 팔다리를 휘저어도 빛은 계속 멀찍이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입에서 물거품이 더 새어 나왔다. 다리 피부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게 뭔가 이상했다. 숨이 얼마 안 남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뭔가 문젠지 휙 돌아봤다. 단단히 뿌리를 내린 해초가 먹잇감이라도 되는 듯 발목을 단단히 감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힘껏 떼려 해 봐도 미끈미끈한 해초는 여간해서 풀리질 않았다. 이제 숨이 다 된 세라 포츈은 마지막 숨이 무심한 물거품으로 올라가며 작아지는 걸 지켜봤다. 소금물이 밀려 들어오며 폐가 따끔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가 흐려지자, 묘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졌다.
지금 가요, 엄마.
극심한 고통에 옆구리가 뒤틀리고 입에선 액체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세라는 내장이라도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억지로 무거운 눈을 떴다. 흐린 시야가 겨우 뚜렷해지면서, 다행스럽게도 쏟아져 나오는 액체가 붉은색이 아니란 게 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가린 희뿌연 해초 같은 게 물에 젖어 늘어진 채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두 손에 힘을 주자 손아귀에 모래가 잡혔다. 이제야 기억의 공백이 메워졌다. 자신이 무릎 꿇고 앉아있는 이곳은 해변이고, 눈앞에 있는 웅덩이는 내장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이 아니라 거품 낀 바닷물일 뿐이었다. 짠물을 토해내려 요동치는 위장보다 먼저, 허파가 부풀며 큰 숨을 들이켰다.
"어린 여자애치곤 참 흉하네. 언뜻 보고 상어 밥인 줄 알았다."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세라의 입에서는 짠물을 뱉어내려는 기침만 터져 나왔다. 요란하게 차려입은 사내애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세라는 등을 대고 바닥에 털썩 누웠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음흉한 미소는 분명 능글맞은 바다 사나이의 그것이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떻게……."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인어를 잡는 중이었거든. 근데 네 다릴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아?"
가쁜 숨이 이제 좀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 다릴 보고 실망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뭐 모양은 그리 나쁘지 않지만, 더 예쁜 다리도 많거든."
세라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흠뻑 젖은 옷이 몸에 휘감겼다. "이보다 더 예쁜 다리가 어딨다고 그래?"
사내애가 깔깔 웃어젖혔다. "그래, 물에서 건져준 보답은 뭘로 할 생각이야?"
"고맙다?"
"고맙다는 말은 접수. 하지만 말로 때울 순 없지." 사내애가 세라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거 내놓는 게 어때?"
머리를 더듬어보니 매끈한 물건이 손에 잡혔다. 세라는 소라 껍데기를 다듬어 만든 아름답게 빛나는 빗을 머리카락에서 뽑아냈다. 엄마 빗이잖아? 의심스레 빗을 살펴보자, 마음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사내애가 갑자기 성큼 다가오더니 세라에게 입을 맞췄다. 그제야 끈질기게 신경 쓰이던 무의식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번개 같은 깨달음이 엄습했다.
이 해변, 이 사내애… 엄마가 돌아가신 바로 그날이었다.
세라는 엄마가 흘린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서 집에서 여기까지 정처 없이 걸어왔던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걸으면서, 옷에 밴 핏물이 바닷물에 흘러들어 가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려고, 그녀는 수면 아래로 몸을 담그고 비명을 질렀다. 파도가 그녀의 눈물과 하나가 되는지, 눈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그날, 소년은 제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날 같았으면 소년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어쩌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지쳐서 소년이 거기 왜 있는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소년의 입이 뭐라고 달싹였지만, 세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소년이 파도를 헤치고 와서 그녀에게 입을 맞췄고,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감정이 더욱 어지러이 소용돌이쳤다.
소년이 엄마의 빗을 손에 쥔 채 몸을 떼며 키득거렸다. 언젠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해적이 될 녀석이었다. 그는 전리품을 손에 쥔 채 느긋하게 장화 신은 발로 모래를 밟으며 멀어져 갔다. 그러더니 빗을 높이 쳐들고 몸을 돌리며 외쳤다. "이리 와서 뺏어봐!" 그리곤 깔깔 웃으며 저 멀리 해안을 점점이 수놓은 검은색 돛들 아래로 사라져갔다.
희한하게도 불끈 열의가 솟아나며, 세라의 가슴이 새로운 목표로 부풀어 올랐다. 이제 어머니의 시신을 묻어 드리고 살던 집을 불태워 없앤 다음, 기꺼이 어머니의 유품인 빗을 되찾아오리라.
기억이 다시 제자리를 되찾자, 미스 포츈은 사내애의 품에서 홱 벗어났다.
"너 대체 누구야?!"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미스 포츈?" 뱃사람 말투는 싹 가셔 있었다.
"뭐라구?"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난… 힘을 키우고 약탈할 거야." 자기 귀에도 신뢰가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한 마디 한 마디가 추상처럼 매서웠다.
숨 막힐 듯한 정적 위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녀석을 찾아야 하니까."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미스 포츈은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물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나 진이 다 빠졌지만, 거듭 질문을 받으니 왠지 활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고맙군."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눈앞의 복도가 이리 오라고 부르는 듯했다. 등 뒤의 대리석 문으로 물러날 수도 있었지만, 세라는 이 생각을 가볍게 떨쳐버렸다. 미스 포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한 상대는 잡고 마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