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산닌슈

미요시 산닌슈
미요시 나가야스미요시 소이이와나리 토모미치

三好三人衆

미요시 나가요시의 중신인 미요시 나가야스를 필두격으로 하는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3인방을 나타내는 말. 산닌슈(3인중)라는 표현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나라의 코후쿠지(興福寺)에서 기록된 미요시 휴가(三好日向), 동 시모츠케(同下野), 이와나리(石成) 산닌슈로 보인다. 이들은 출신과 출세 과정조차 제각각이었으나, 모두가 당시의 무가 문화에 능통하였고 뛰어난 능력으로 나가요시의 신임을 얻어 미요시 정권의 중추로 떠오르게 되었다.

나가요시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 미요시 요시츠구를 보좌하며 적극적으로 그를 따라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키는 등 키나이의 정치를 진행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해 요시츠구 정권의 또 다른 중추 세력이던 마츠나가 부자와 대립하며 미요시 가문은 내전 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아와시노하라 나가후사의 지원을 얻어 히사히데를 몰아붙이며 상시 우세를 점하였으나 점점 요시츠구를 경시하며 새로이 쇼군을 옹립하는 등 나가후사와 함께 자신들만의 정치를 실행하기 시작하였다.[1] 이 결과 요시츠구는 히사히데 측으로 망명하였고, 이들이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게 되면서 결국 전쟁에서 패배, 키나이 전토를 상실하고 아와로 쫓겨나게 되었다.

아와로 쫓겨난 이후에도 나가후사와 함께 아시카가, 오다 세력에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소이는 이미 1569년에 사망해버렸고 1573년에 나가후사가 미요시 나가하루를 위시한 시코쿠군에 전사, 포위망 붕괴후 나가야스는 행방불명되고, 토모미치는 호소카와 후지타카군에 전사하게 되면서 이들의 세력은 와해되었다.
  1. 결과적으로 나가후사가 추대한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제대로 된 상락을 하지 못하였고 미요시 가문의 본성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산닌슈는 요시히데의 추대에 소극적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