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리그의 심판
후보: 바루스
날짜: CLE 22년 3월 7일
관찰
혹시라도 전쟁 학회 안에서 휘두르고 싶어질까 봐 걱정이 든 바루스가 활을 빨아들이자, 무기는 스르륵 손바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티끌 한 점 없이 반들반들 닦여 있는 회랑 벽에 붙은 장식용 방패와 검이 그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두 팔은 액체처럼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일종의 검은색 장갑으로 연결돼 있고, 발끝에서 허리까지 지저분하고 혼탁한 기운이 딱지처럼 더덕더덕 뒤덮고 있다.
언뜻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무수한 색깔이 뒤섞여 바루스의 피부 위를 끈적한 석유처럼 흐르고 있다. 이 오염물질이 아직 온전히 남아있는 사람 살을 더 파고들어 오진 않았을까 바루스는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곤 거울에 미치는 모습이야 어떻든 간에,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아직 균형이 깨지진 않았다며 애써 위안 삼는다.
아직 끝장나지 않았어. 바루스가 다짐하듯 말한다. 난 망가진 게 아냐. 겉모습만 좀 바뀐 것뿐이지.
회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법이지.
테샨에게 활 잡는 법, 활시위를 당기는 법,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바루스 역시 활쏘기에 대해 더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다. 바루스가 사원의 수호자로 임명됐으니, 아들은 이제 스스로 무예를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늘 곁에서 지켜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루스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현실이 아니란 걸 날카로운 눈은 이미 간파한 터였다.
이건 소환사들이 리그의 챔피언 후보를 놓고 벌이는 장난 같은 심사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눈앞에 자신의 아들이, 그것도 살아서 서 있지 않은가. 바루스는 아들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헝클어뜨리며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이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들 곁에 다시 설 수 있는 이런 축복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다. 언덕을 올려다보던 둘의 시선이 사원에 가서 멈췄다.
사원은 이 마을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풍요의 시대를 온몸으로 웅변하듯, 실용성이란 찾아볼 수 없게 지은 건물이었다.
“팔라스의 구덩이에요,” 아들이나 아들이 아닌 존재가 말했다. “저기 팔라스의 구덩이가 보여요.”
“그래, 그땐 알지 못했지만 네 말이 맞다.” 바루스가 아들에게 대답했다.
“저걸 혼자서 지키게 했단 말이에요?”
“그랬단다.”
새로 수호자 역할을 맡은 이후부턴 놀랄 일 투성이였다. 어려서부터 매일 같이 드리던 기도문에는 중요한 부분들이 몇 가지 누락돼 있었다. 원로들이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었다.
얼굴, 가슴, 양팔에 지혜로운 올빼미 문신을 새겨 넣자 통찰력이 올라간 것도 놀라웠다. 게다가 그 구덩이의 실체란. 겨우 지름 1.5미터 정도에 아무 특색도 없는 둥근 구덩이가 이렇게나 큰 근심의 근원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더 놀라웠던 사건은 처음 경비를 서던 날 일어났다. 구덩이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물리치기 쉬웠으리라. 구덩이는 거의 순간적인 환영이나 감각으로 말을 걸어왔다. 인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이 구덩이는 주위에 인간이 있는 걸 감지했다. 언덕 어귀에 인간들이 둥지를 틀고 있음을, 아둔한 육신에 갇혀 몸부림치고 있음을 구덩이는 모두 알았다. 바루스는 구덩이가 느끼고 있는 혼란을, 일종의 아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원에 의해 격리된 오랜 세월 동안 쌓여간 감정이었다. 구덩이는 바루스가 좋아할 만한 걸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에게 계속 뭔가를 주고 싶어했다. 구덩이는 남들을 만족하게 해 주려고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가둬두겠노라 약속했던 그런 ‘인정사정없는 괴물’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루스가 아침 봉인 의식을 치르려 성소에 들어섰더니, 젊음의 생기를 만끽하며 서 있는 자신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서 말라 비틀어지며 피부 거죽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환영이 보였다. 구덩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란 느낌이 확 들었다.
“지금 이렇게 해 줄까?” 구덩이가 그의 대답을 기대하며 제안했다.
“아니.” 바루스는 거절했다.
구덩이가 다시 말을 걸어오자, 현실은 완전히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는 발목까지 오는 피 웅덩이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물결이 번지면서 점점 올라오더니 마침내 굉음을 울리며 거대한 파도가 됐다. 그러더니 목소리가, 아니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것이 애원하듯 다시 말을 걸었다. “지금 어때?”
그때 로즈마리와 참나무 향의 톡 쏘는 연기가 바루스의 환영을 비집고 들어왔다. 두 손을 뒤로 짚으며 털썩 쓰러진 바루스는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향로에 향을 채워 넣으려 했다. 하지만 구리 사슬에 걸리는 바람에 향로가 엎어지고, 내용물이 바루스의 손을 사정 없이 지져댔다.
“지금인가?”
구덩이의 음성이 마음속에서 쩌렁쩌렁 울렸지만, 이번엔 올빼미가 구덩이의 유혹을 물리쳐줬다. 올빼미의 힘에 기대어 미로 같은 벽을 따라 겨우 문으로 가자, 불길에 휩싸인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이 처참한 광경을 보아야 하다니.
왠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바루스는 무작정 달렸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번에만은, 전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 어쩌면, 어쩌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러져버린 활 옆에 처참한 주검이 되어 누운 아내와 아들을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만큼은 그 활을 집어 들고서 사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겨주지 않았다.
수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환영이 보였다. 갈비뼈를 뚫고서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바루스는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인가?” 구덩이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 지금.” 바루스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이야, 젠장.”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둑이 터지고 잠잠하던 웅덩이가 심연으로부터 터져 나와, 닿는 곳마다 끓어오르는 검은 유리로 날카롭게 할퀴어댔다. 허공으로 분출하며 피어나는 연기 기둥을 휘감아 돌던 액체가 급기야 바루스를 찾아 쓰러뜨렸다. 액체는 손에 닿아 살갗을 벗겨내더니 집어삼켜 버렸고, 이윽고 화살마저 먹어 치웠다. 두 팔, 두 다리를 먹어 들어가던 액체는 올빼미 문신이 새겨진 부분에 와서 그만 딱 멈췄다. 구덩이의 마력이 올빼미의 힘까지는 억누르지 못한 탓이었다. 무심한 광기의 그 순간, 바루스는 문득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이내 과거의 기억이 물러가고, 소환사 하나가 힘겹게 헐떡이는 게 보였다. 환영들이 속박에서 풀려나려 몸부림치며 끔찍한 악몽 같은 장면들을 계속 내보였다. 그리곤 점차 회고실의 모습이 분명히 자리를 잡으며, 기묘할 정도로 눈부시게 바루스가 겪어온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루스는 발끝만 겨우 지면에 닿아 있었다. 병력이 가까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바루스가 덮치자 행렬의 맨 앞에 있던 마차만은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머리가 따르지 않는 자들, 혹은 그저 운이 없는 자들은 바루스에게 순식간에 죽어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바루스가 공격하던 속도를 늦추자, 모양은 어떨지 몰라도 기능만은 똑같은 활이 그의 손목에서 생명이라도 얻은 듯 저절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이 무기를 쓰는 법은 따로 배울 필요도 없었다. 남자 한 명이 바로 화살에 맞아 술 자루처럼 터져나갔다.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속도를 자랑하는 녹서스 군인들도 놀랄 수 밖에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달아난대도 이들은 역시 피와 살로 된 인간일 뿐이었다. 빠른 속도만으론 그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바루스의 활에서 발사되는 기운은 비록 진짜 화살은 아니지만 마치 진짜처럼 녹서스의 기치 아래 선 모든 병사들을 하나씩 처치해 나갔다. 쭉 뻗어 나간 기운은 피에 굶주린 듯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며 적들을 붙들고 묶어 놓았다. 적을 하나하나 해치울 때마다 바루스의 활시위는 더 빠르게 당겨졌고, 종국에는 각각의 화살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가 됐다. 바루스의 목표로 잡히면 속절없이 달아나다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며, 사냥과 피의 향연이 계속 이어졌다. 자비를 약속하기도 했지만, 이를 지킨 적은 없었다.
이제 어둠이 휘몰아치며 축축하게 젖은 낙엽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몰살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뭉그러진 남녀의 시신들과 합쳐져 묘하게 들척지근한 냄새였다. 바루스는 부서진 마차 위로 몸을 굽히고서, 그가 발사했던 촉수에 관통된 성명서를 움켜쥐었다. 성명서에는 전쟁을 지시했던 망할 녹서스 놈들의 이름이 더 적혀 있었다…
빌어먹을 전범들. 네놈들이 앗아간 건 천 배로 갚아주리라.
소환사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어떤 결정을 내린 건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소환사의 움직임과 함께 마지막 환영의 자락이 걷혀 나갔다. “당신이 여기 온 목적은 분명하군. 우리 챔피언 중에 녹서스 요원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거야.” 그녀가 손을 앞으로 저었다. “이 모든 게 복수를 위한 거지.”
“물론, 리그에서 그대의 개인적인 복수 같은 걸 원하진 않는다는 것쯤 알고 있겠지?” 소환사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젠 그대도 깨달았을 텐데.” 바루스, 아니 어쩌면 바루스의 형상을 한 미지의 존재가 퉁퉁 부은 시꺼먼 혀를 내보이며 대답했다.
“나한테 남은 목표는 그거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