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이름은 아부 알 무자파르 루큰 알 딘 바르키야루크 빈 말리크샤다.
중간의 바르키야루크란 터키어 베르크 야룩Berk Yaruk을 아랍어로 적은 것인데, 그 의미는 강렬하게 빛나는 이다.
1092년부터 1105년까지 셀주크 제국의 술탄이였다. 하지만 단 한번도 단독 술탄이 되지는 못 했다.
أبو المظفر ركن الدنيا والدين بركياروق بن جلال الدولة ملك شاه (아랍어)
أبو المظفر ركن الدنيا والدين بركياروق بن ملكشا (페르시아어)
Ebu Muzaffer Rükneddin Berkyaruk bin Melikşah (현대 터키어)
1 생애
말리크샤 1세의 장남이다. 본래 그의 위에 형 두명이 더 있었으나,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바르키야루크가 사실상의 장남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말리크샤 1세의 사망 시점에 13세에 불가했다.
말리크샤 1세가 죽자(1092) 그의 아내인 테르켄 하툰[1]이 그녀의 아들인 마흐무드 1세를 술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군대에 돈을 뿌리고, 남편에게 폐위당한 칼리프를 복위시켜 주었다. 그 결과 그녀는 마흐무드 1세를 술탄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란을 다스리던 관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니잠 알 물크가 그랬듯, 장남이 제국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르켄 하툰과 그의 측근들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바르키야루크는 라이에서 술탄이 되었다. 내전이 시작됐다.
1094년, 테르켄 하툰이 죽었다. 그에 따르듯 그녀의 아들 마흐무드 1세도 죽었다. 그리하여 바르키야루크는 단독 술탄이 되었으나,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삼촌들이 말썽이였다. 호라산의 아르슬란 아르군과 다마스쿠스의 투투쉬 1세가 술탄을 거부했다. 투투쉬는 시리아의 군벌들을 규합해 디야르바크르 지역을 합병하고, 이란으로 진군했다. 바르키야루크와 투투쉬의 군대는 라이 근교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투투쉬는 죽었다.(1095)
이번에는 호라산의 아르슬란 아르군이 독자적인 왕조를 선포했다. 1097년, 바르키야루크는 그를 패퇴시켰다. 그 뒤에는 술레이만[2]의 아들 무함마드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역시 바르키야루크에 패배했다.
5년에 걸친 술탄위 투쟁을 승리로 끝마친 그는 영지를 다시 분배했다. 우선 동생들에게 삼촌들의 영지를 주었다. 호라산에는 아흐마드 산자르를 보냈고, 무함마드 타파르를 간자 지방 영주로 임명했다. 시리아에는 투투쉬의 아들들이 지배하게 놔두었고, 소아시아의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위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라크와 자지라의 공국들도 대체로 아버지의 분배를 따랐다.
이러는 사이에 십자군이 침공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1097년, 간자의 영주 무함마드 타파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호라산의 아흐마드 산자르도 호응했다. 아흐마드 산자르는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al-Sulṭān al-Mu'aẓẓam(우월한 술탄)라는 칭호를 바쳤다. 또, 자지라와 이라크의 공국들도 타파르에게 갔다. 제국의 반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1099년, 타파르는 칼리프의 인정까지 받아냈다. 곧 바르키야루크의 지지기반이던 관료들도 그를 떠났다.
바르키야루크의 남은 치세에는 끝없는 전쟁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뤘다. 무함마드가 이란으로 들어오지 못 하게 하고, 반항하는 튀르크 아미르들을 토벌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냐하면, 1101년까지 바그다드는 주인이 8번 가량 바꼈다.
이러다보니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았다. 그래서 그는 개인 재산을 몰수하여 이크타[3]로 사용하거나, 심지어는 시아파를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1104년, 전쟁에 지치고 병마에 시달리던 바르키야루크는 무함마드에 비해 훨씬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와 타협했다. 타파르는 디야르바키르, 아제르바이잔, 알 자지라 지역에서 술탄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릴수 있게되었다. 산자르는 사실상의 독립적인 군주였다.
1105년, 바르키야루크는 25번째 생일을 맞기 며칠 전에 보루제르드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이 이스파한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루제르드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다.이 때도 무함마드와 전쟁 중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2 평가
당대의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않다. 대다수는 그가 경험 없는 지도자인데다 알코올 중독자라고 적었다. 게다가 시아파라는 음해까지 당했다.
시아파라는 공격은 그와 인연이 특히(......) 깊다. 테르켄 하툰과 싸울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이 공격은 죽을때까지 함께했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칼리프도 이에 대해 비난을 보냈다. 이 비난은 그가 재정 문제로 인해 이스마일파를 군대에 편입시킨 뒤에 더 늘었다. 다만 그의 재상도 그런 오해를 받은 점을 보면 아무래도 당대의 주요한 공격 수단[4]이였던 듯 싶다. 어쨋든 실제로 그가 시아파였다거나, 시아파에 동정적이였다는 증거는 없다.
또, 그는 평생 아버지와 비교 당했다. 모두가 그를 아버지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 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도 나올만 한게, 바르키야루크의 지배 영역은 이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영토는 사실상 할아버지인 알프 아르슬란 시절의 영토이다.
다만 말리크샤 1세 역시 17살에 술탄이 되었으나, 35살이 돼서야 우리가 아는 셀주크 제국의 영토 대부분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았음을 생각하면 이 평가도 너무 박한듯 하다. 죽기 직전에 그는 무함마드 타파르보다 일단은 유리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그는 25년간의 생애 중 절반을 전쟁으로 보냈다. 그는 언제나 병마에 시달리고, 몇 번인가는 암살자들에 의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고, 결국 병마가 그를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