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즈 웃 딘 아흐마드 산자르.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술탄이다. 산자르는 터키어로 찌르는 이라는 의미이다.
1085년에 말리크 샤 1세의 5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제일 위의 두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3남이다. 형제들 중 어머니가 같은 사람은 무함마드 타파르 밖에 없다.
1097년 베르크 야룩에 의해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1099년에 무함마드 타파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술탄을 버리고 무함마드 타파르의 세력에 가담했다. 이후 1104년 타파르와 베르크 야룩 사이의 협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자율권을 얻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활달한 군사적 활동을 보였는데, 말년까지 대체로 성공적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1102년 산자르는 카라한 왕조의 지브라일 칸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는 방어에 그치지 않고 역습을 가하여 지브라일의 자리에 자신의 조카 무함마드를 앉혔다(이후 무함마드 2세). 원정 후에 반항한 군주의 자리에 셀주크 가문의 피가 섞인 자를 대신 앉히는 것은 산자르의 원정 대부분에 취해진 조치이다.
1104년 산자르는 휘하의 아미르를 보내 이스마일파를 토벌했다. 여기서 이 아미르는 협상을 위장하여 이스마일파에 접근하여 마지막에 그들을 학살했다. 산자르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각지에서 이스마일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산자르는 1105년 내내 이스마일파의 반격에 시달렸다. 베르크 야룩이 이스마일파에 호의적이였던 것[1]이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1116년에는 가즈나 왕조를 원정했고, 그 이듬해에 가즈나 술탄의 동생을 술탄위에 올렸다. 이 이후 가즈나 왕조는 결코 자주적 위치에 서지 못 했다.
1118년 무함마드 타파르가 죽고 그의 아들 마흐무드 2세가 즉위하자, 그에 반발하여 그를 몰아냈다(1119년). 산자르는 마흐무드를 서부의 부술탄으로 임명했다.
1126년 산자르는 호라산의 이스마일파를 학살할 것을 명하고, 그 본인은 알라무트를 공격했다.
1130년에는 반항을 시작한 무함마드 2세를 공격했다. 여기서 산자르는 서카라한 왕조의 칸에 여러명을 임명하는 바람에 트란스옥시아나는 2년간 전쟁에 시달렸다. 결국 그의 조카인 마흐무드 2세가 즉위했다.
1131년에는 서부의 부술탄 마흐무드가 죽었다. 그의 동생들이 산자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이듬해 산자르가 그들을 응징했다. 산자르는 마흐무드의 형제들 중 순종적인 이를 부술탄에 임명했다. 하지만 압바스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 빌라의 충동을 받은 마흐무드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1130년대 내내 내전중이였다.
1134년 산자르는 휘하의 아미르에게 이스마일파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이 아미르는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스마일파의 뇌물에 넘어가 퇴각했다.
1135년에 부술탄 마수드가 압바스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 빌라를 사로잡았다. 그는 곧 암살 당했다. 사람들은 이 배후에 산자르가 있다고 주장했다. 알 무스타르시드의 아들인 알 라쉬드 빌라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는 군대를 모았다. 1136년, 마수드가 다시 바그다드로 와서 그를 폐위하고, 알 묵타피 빌라를 칼리프에 임명했다. 1138년 라쉬드는 그를 호위하던 호라산 연대에 의해 죽었다. 이 살인도 산자르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1135년, 산자르는 연공 납부를 거부한 가즈나를 공격했다.
1138년, 산자르는 호라즘 총독 아트시즈를 공격했다. 아트시즈는 도망쳤다. 산자르는 총독을 새로 임명하였으나, 이 총독은 돌아온 아트시즈에 의해 쫓겨났다. 산자르는 결국 아트시즈를 총독으로 재임명했다.
1141년, 산자르는 트란스옥시아나로 왔다. 카트완에서 카를룩─카라 키타이군과 격돌했고, 패배했다. 아트시즈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을 약탈했다. 하지만 산자르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쳤다. 1143년에 호라즘을 공격하였고, 1147년에 다시 공격해 아트시즈의 복종을 받아냈다.
1152년 산자르는 가즈나 술탄에 대항하는 구르족을 공격했다. 이 원정이 산자르에 있어 마지막으로 성공적인 원정이였다.
1153년, 산자르 휘하에 있던 오우즈(구즈, 오구즈)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산자르는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지휘관들의 배신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그는 3년간 포로 생활을 보냈다. 제국이 무너져내리는 동안.
1156년, 산자르는 드디어 탈출하여 마르브로 들어갔다. 이 곳에서 1년간 세력을 만회하려 하였으나, 1157년에 죽었다. 야사에 따르면, 호라산의 황폐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 몸을 망쳤다고 한다.
산자르의 긴 재위 기간, 막강한 권력, 재위 초반의 영웅적인 성과들과 재위 후반의 재난, 셀주크 가문의 인물들 중 이란 전체를 지배한 마지막 술탄이라는 지위등을 이유로 그는 "대 셀주크 제국"의 명성 이상의 명성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