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벨라 바르톡 |
1 개요
벨러 버르토크(Béla Bartók, 1881년 3월 25일 ~ 1945년 9월 26일), 본명은 버르토크 벨러 빅토르 야노시(Bartók Béla Viktor János).[1]
헝가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며 중부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민요를 수집해서 연구한 음악학자이기도 하다.[2]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과 더불어 현대음악 초반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며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의 민속음악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어법을 창시하였다. 오늘날 작곡가와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막상 석사 논문 보면 황금비 얘기로만 상당수 때워먹는다
바르톡의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Texas Festival Chamber Orchestra with Linus Lerner |
2 생애
2.1 초기
바르톡은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부분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인 벨라 바르톡 시니어(아들과 이름이 같다)는 지역 농업학교 교장이었으며 바르톡이 8살때 사망하였다. 바르톡과 여동생 엘자는 피아노 선생이었던 어머니 파울라 바르톡과 이모 이르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9살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에 두각을 나타내어 11살때 최초로 연주회를 가졌다. 이후 포조니(Poszony, 현재는 체코의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에서 도흐나니를 만났고 18살인 1899년부터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했다.[4] 당시 그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5] 입학 후 3년 동안은 습작수준의 작곡만 하다가 1903년 작곡가로서 최초의 본격적인 작품 교향시 코슈트(Kossuth) [6]를 완성하여 이듬해 초연하였다. 1904년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Op.1),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케르초(Op.2), 피아노 5중주 C장조(미발표) 등을 작곡하는 동시에 최초로 민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민요수집은 그의 음악스타일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의 필생의 작업이 되었다.
예전의 그를 비롯한 헝가리의 음악인들은 헝가리 민요에 대해 프란츠 리스트의 곡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집시 멜로디가 그 근본이라고 생각했었고 바르톡은 교향시 코슈트나 피아노 랩소디 등에서도 그런 선율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마쟈르(헝가리인) 농부들의 민요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나서는 집시 멜로디가 아니라 이 농촌의 민요가 진짜 헝가리의 민속음악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7] 바르톡은 자신보다 1년 후배이자 이후 자신에 필적하는 대작곡가가 된 코다이 졸탄과 같이 민요를 수집하면서 그의 음악은 점점 더 민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코다이가 클로드 드뷔시를 파리에서 데려오면서 그와도 교류했다.
1906년에 코다이와 합작으로 최초의 민요집인 '20개의 헝가리민요'를 출판하였고, 이후 주기적으로 바르톡은 다수의 민요를 편곡한 성악곡을 작곡했으며 기악곡에도 점차 민속음악의 특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민요의 영향을 제대로 반영한 최초의 기악작품은 바로 현악 사중주 제1번(1908)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수입원은 피아노 연주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곡이나 민요채집은 제한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1907년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서 피아노 교수직을 맡으면서 드디어 제대로 된 고정수입원을 얻어 정착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마음놓고 작곡활동과 민요 수집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일대의 민요를 다수 수집하였다.
한편 그의 초기 관현악 수법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큰 영향을 주었는데, 1902년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다페스트 초연을 들었을 때 바르톡은 큰 충격을 받았고 '영웅의 생애'는 아예 피아노로 편곡하여 직접 연주할 정도로 슈트라우스에게 열광하였다. 코슈트 교향시를 비롯한 바르톡의 초기 관현악곡(예를 들면 관현악 모음곡 1, 2번 등)을 들어보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짙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2.2 원숙기
바르톡과 22살 연하의 두번째 아내 디타 |
1908년은 그의 음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점에 나온 14개의 바가텔(Sz. 38)이나 현악 4중주 1번(Sz. 40) 등의 작품에서 바르톡은 이제까지의 후기 낭만주의적 성향과 완전히 결별하고 민속음악의 각종 어법을 소재로 좀더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관현악 쪽에서도 점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어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지글러 가문의 두 딸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2년 후 동생인 마르타 치글러(Márta Ziegler)와 결혼하여[8]1910년에 바르톡 벨러 주니어를 낳았다.
한편 바르톡은 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을 때까지 작곡가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는 너무 급진적었으며 헝가리 민요의 선법체계를 응용한 그의 작법은 청중이나 동료 음악가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마르타와 결혼 직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서 부조니의 주선으로 뱅상 댕디나 이시도르 필립 등 당시 프랑스의 유력음악인들을 만났으나 이들은 바르톡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국인 헝가리에서도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는데 1911년에는 아내 마르타에게 헌정한 바르톡의 유일한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Blubeard's Castle)을 헝가리 고등예술 협회(Hungarian Fine Arts Commission) 주최의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연주할 수 없다며 출품을 거부당했다. 그는 이 오페라를 어떻게든 공연하려 했지만 헝가리 정부는 오페라의 작사자 벨러 벌라지(Béla Balázs)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라는 압력을 주었다. 바르톡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이 오페라는 1918년까지 공연될 수 없었다. 콩쿠르의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작곡을 중단하고 모든 형태의 공적인 음악활동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 그는 음악학자로서 민요수집에 열중하였고 민속음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다수의 글을 언론에 기고하였다. 또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 터키 일대의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민요 수집이 힘들게 되자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1차대전 중 작곡된 발레곡 허수아비 왕자(Wooden Prince)가 1917년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뒤늦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9] 같은 시기에 피아노 모음곡(op. 14, sz 62)과 현악 4중주 2번(sz 70) 같은 바르톡 초기를 대표할만한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1차대전은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이 났고 헝가리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바르톡 가족의 경제상황도 계속 악화된데다 1919년 6월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른다.[10] 정치적 혼란을 피해 여기저기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작곡을 하였는데, 허수아비 왕자에 이어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발레곡 중국의 이상한 관리(The Miraculous Mandarin)와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 중국의 이상한 관리는 1919년 작곡이 완료됐으나 파격적인 스토리때문에 1925년에야 헝가리 영역 밖에 있는 프라하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두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작품 중 화성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가장 난해하며 당시의 통상적인 음악문법에서 가장 멀어져 있다.[11]
1923년 바르톡은 마르타와 이혼하고 그에게 피아노를 배운 디타 파스토리(Ditta Pásztory)와 재혼하여[12] 다음해인 1924년에 두 번째 아들 페테르(Péter)를 낳았다. 바르톡은 이후 한동안 작곡에 손대지 않다가 아들 페테르 바르톡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한 여섯 권 분량의 피아노 연습곡 《미크로코스모스》(1926~37)를 썼다. 이후에 쓴 현악 사중주 제6번(1939)는 그가 유럽에서 쓴 마지막 곡이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5~6년간은 작곡가 바르톡의 진정한 황금기로서 이 시기에 현악4중주 6번과 미크로코스모스 외에도 현악4중주 5번(1934),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1936), 두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1937, 1940년에 협주곡 버전으로 개작), 바이올린 협주곡 2번(1938), 현을 위한 디베르티멘토(1939) 등 그의 대표작들이 대거 탄생하였다.
2.3 미국으로 이주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고 그는 헝가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9년 미국 여행 때 시게티를 알게 된 바르톡은 그의 권유로 미국 망명을 결심하고, 1940년 10월 8일 부다페스트에서 야노슈 프렌치크의 지휘로 최후의 연주회를 열게 된다.
그는 나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독일에서 유명해졌을 때에도 독일에서의 콘서트를 거부했고 독일 출판사와도 계약하지 않았을 정도였다.[13]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한 세계관은 헝가리의 우익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는 부인과 함께 마지못해 미국으로 떠났다. 페테르는 1942년 미국으로 가서 후에 미 해군에 입대한다. 전처 마르타의 소생이었던 벨라 바르톡 주니어는 헝가리에 남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생활은 편하지 않았다. 뉴욕으로 건너간 바르톡은 콜럼비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몇 차례 강연도 하고 각지에서 채록한 민요도 정리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많이 알려진 작곡가가 아니었으며 미국인들에게 그의 음악스타일은 너무 생소하고 어려웠다. 그의 재정 상황은 매우 안좋았고 건강은 점점 나빠졌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14]
그는 현악 사중주 제6번(1939)을 끝으로 작곡을 그만 두려 했지만,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탁으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Orchestra)(1943~5)을 작곡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누힌의 위탁을 받아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생애 최후의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제3번과 비올라 협주곡에 착수했으나 두 작품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15]
미국에서 바르톡의 음악성향은 유럽에서 보여주었던 전위성과 실험성 대신 좀더 듣기 편하고 전통적인 작법으로 회귀하였지만 민요의 선율과 리듬을 차용하는 수법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국 시절의 바르톡은 자작곡 편곡이나 민요에 의한 가곡 등을 제외하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피아노협주곡 3번/비올라 협주곡 4작품만 남겼다. 모두 의뢰를 받고 작곡한 것들인데 그나마도 피아노협주곡과 비올라 협주곡 두 작품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아버렸다. 하지만 이 4작품은 모두 음악적 가치가 높은 명작들이며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1945년 9월 바르톡은 뉴욕 시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4세. 바르톡의 유해는 뉴욕 주 Hartsdale에 있는 펀클리프 묘지(Ferncliff Cemetery)에 안장되었다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직전인 1988년 7월 7일에 부다페스트의 파르카스레티 묘지(Farkasreti Cemetery)로 안장되었다.
3 음악 목록
바르톡의 음악목록은 안드라스 죌뢰지(András Szőllősy , Sz.), 라즐로 솜파이(László Somfai , BB.) , 데니츠 딜(Denijs Dille, DD.) 세 사람에 의해 정리되었으며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sz.와 BB.를 함께 사용하는데, 죌뢰지나 솜파이는 바르톡의 발표되지 않은 초기작품이나 습작에 대해서는 따로 분류를 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초기 작품은 DD. 번호를 사용하여 분류한다.[16]
한편 바르톡 본인이 붙인 작품번호(Opus, Op.)도 존재하긴 하지만 번호를 붙인 작품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관계[17]로 잘 쓰이지는 않는다.
4 작품의 주요 특징
- 기악곡이 작품 목록의 중심이다. 물론 바르톡은 성악작품도 다수 썼지만 네 개의 가곡 작품(Sz10,15,61,63)과 세속칸타타를 제외하면 성악곡들은 전부 민요를 편곡한 것들로 오늘날에는 그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 서양 음악가 중에 보기 드문 무신론자였으므로 종교음악이나 종교성향의 작품은 일절 쓰지 않았다.[18]
5 주요 작품
5.1 오페라
- 푸른수염의 영주님의 성(Bluebeard's Castle, sz 48) : 그의 유일한 오페라로 단막으로 되어 있으며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품.
5.2 발레음악
- 허수아비 왕자(The Wooden Prince, sz 60) : 바르톡에게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19]
- 놀라운 만다린(The Miraculous Mandarin, sz 73) :표현주의가 유럽 문화사조를 휩쓸었던 1910~2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답게 표현주의
쉽게 말하면 엽기성향의 발레작품이다. 상스럽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1919년에 작곡을 완성해 놓고도 1925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프라하에서 초연됐으며 초연되자마자 쾰른지방의회에 의해 공연금지처분을 받았다. 바르톡의 모국인 헝가리는 한술 더 떠서 그의 사후에야 간신히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되었다. 가사가 없는 합창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에 음악부분이 따로 모음곡으로 편곡되었다. 현재에는 극 전체가 공연되는 경우는 드물고 주로 모음곡만 연주된다.
5.3 관현악
-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sz 106): 특이한 곡명 덕분인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그가 즐겨 사용했던 피보나치 수열작법의 정점을 찍은 곡이다.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 음의 조성과 화성체계를 바꾸었고, 새로운 주제의 도입, 악기의 배치, 음색 변경 등의 시점을 정했다.
- 춤 모음곡(Dance Suite) : 부다페스트 시 건설 50주년 기념[20]으로 시에서 위촉한 곡. 바르토크의 곡 중 처음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만년에 작곡된 곡으로, 그의 관현악곡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 교향시 코슈트
-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 대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1번 Op.3
- 소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2번
- 루마니아 댄스
- 4개의 소품 Op.12
- 허수아비 왕자 모음곡 Op.13
- 놀라운 만다린 모음곡 Op.19
- 루마니아 포크 댄스
- 헝가리 스케치
- 헝가리 농민의 노래
5.4 협주곡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 Op.1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스케르초 불레스케 Op.2
- 피아노협주곡 1번
- 피아노협주곡 2번 G장조
- 피아노협주곡 3번 E장조: 마지막 17마디는 작곡가가 사망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했는데, 다행히 스케치가 남아 있어서 현재는 완성된 형태로 연주된다.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두 개의 초상화 Op.5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랩소디 민요 춤곡 1번, 2번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 비올라 협주곡[21]
5.5 실내악
5.5.1 현악 4중주
바르톡의 현악 4중주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이후 실내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군으로 손꼽히고 있다. 각 현악 4중주마다 새로운 실험과 작곡수법들이 시도되고 있어서 작곡된 시점의 바르톡 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6곡 중 2번이나 5번을 최고로 치는 경우도 있는데 각 작품 모두 뚜렷한 특징과 개성들이 있어 우열을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 현악 4중주 1번 A단조 Op.7
- 현악 4중주 2번 A단조 Op.17
- 현악 4중주 3번 C샤프 단조
- 현악 4중주 4번
- 현악 4중주 5번
- 현악 4중주 6번
5.5.2 기타
-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sz 110): 이 곡은 작곡가 본인에 의해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으로 개작된 버전(sz 115)도 있다.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44개의 이중주
- 피아노 5중주 C장조 Sz23 BB33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1번, 2번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BB28
- 바이올린 소나타 1번 Op.21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 클라리넷, 바이올린, 피아노를 위한 대비(對比)
5.6 피아노
- 알레그로 바르바로(sz 49)[22] Christopher Andrews 연주.
- 피아노 소나타 : 그의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로 바르톡 피아노음악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
- 미크로코스모스[23]
- 6곡의 루마니아 민속무곡 (sz 47a)[24]
- 14개의 바가텔 Op.6(sz 38)[25]
- 어린이를 위하여 Sz42 BB53
- 피아노 모음곡 Op.14
- 작은 모음곡 Sz105 BB113
- 광시곡 Op.1 Sz26 BB36a: 위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 Op.1과는 다른 작품
- 소나티나 Sz55 BB69
- 문 밖에서 Sz81 BB89
5.7 무반주 작품
5.8 가곡
- 3개의 노래 Sz10 BB15
- 4개의 노래 Sz15 BB24(러요시 포사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함)
- 5개의 노래 Op.15 Sz61 BB71
- 5개의 노래 Op.16 Sz63 BB72
5.9 합창
- 세속 칸타타 Sz. 94 BB 100
6 음악 스타일
바르톡의 작곡기법은 오늘날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거의 전공필수라고 해도 될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바르톡 음악 연구서도 상당히 많다.
그의 음악을 요약해서 표현하자면 민속적, 구조적, 타악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바르토크의 민속음악 이용법을 보면, 그는 강연에서 작곡가가 민속음악을 쓰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선율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서[28], 이 때 작곡가는 작품의 구조와 화성을 통해 그의 창조성을 드러내게 된다. 둘째는 민속적 모티브를 작품 내에 이용하는 것으로, 작곡가는 더 많은 재량권을 갖는다. 마지막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민속적 선율과 리듬을 창조하여 이용하는 것으로서, 그는 이 방법은 '민속음악을 진정으로 체화한' 작곡가만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 ↑ 헝가리는 작명 순서가 성+이름순으로 우리나라와 같다.
- ↑ 중국,일본의 민요도 수집했고 한국의 민요도 두 곡 정도수집했다고 한다.
- ↑ 그가 태어난 너지센트미클로쉬(Nagyszentmiklós)는 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 마레(Sânnicolau Mare)이다.
- ↑ 바르톡의 피아노 연주실력을 본 음악학원 원장은 그를 월반시켜서 바로 2학년으로 입학시켰다.
- ↑ 사실 바르톡은 생애 중반까지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 더 유명했다.
- ↑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영웅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를 기리기 위한 작품.
- ↑ 그 때까지 헝가리의 음악인들은 화려하고 정교한 집시의 음악에 비해 단순하고 소박한 농촌의 민요는 음악적 소양이 없고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천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집시음악 우위론은 바르톡보다 70년 먼저 태어난 헝가리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에 의해 굳건하게 형성된 개념이었는데, 바르톡과 코다이 시대가 되서야 비로소 이런 편견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 ↑ 결혼당시 바르톡은 28세, 마르타는 16세로 띠동갑이었다. 첫번째 부인 마르타도 바르톡의 제자였지만 후처인 디타도 그의 제자였고 모두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어린 신부감 찾으려고 제자를 받았나봐사실 예전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차였다. - ↑ 공교롭게 허수아비 왕자의 대본도 전술한 벨라 발라쥬가 작성했다. 이 발레곡이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이제까지 연주되지 못했던 벌라지 대본의 푸른 수염 영주님의 성이 비로소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1918년 마침내 초연이 이루어진다. 한편 사회주의 성향의 대본작가 벌라지는 1차대전 직후 헝가리를 장악한 공산주의 정권에 투신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는 바람에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 ↑ 바르톡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주기적으로 큰 병을 앓았으며 이런 증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큰 병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야 했으며 학자들은 이런 점들이 바르톡이 평생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을 갖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토크가 얼마나 주변 사람과 교류가 없었던지, 바르토크와 지글러의 결혼은 그의 어머니조차 결혼식 당일(!) 알게 되었으며, 코다이와 도흐나니 같은 친구들은 한참 후에야 알고 뒤늦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 ↑ 바르토크는 이 작품 이후 한동안 별다른 작품을 내놓지 못하다 1926년 들어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가 그동안 추구해온 12음 기법과 민속음악의 융합을 포기한 것이며, 그 이후 바르토크의 모든 작품들은 표현주의를 멀리하며 확고한 조성 위에 자리잡게 된다.
- ↑ 이혼의 원인은 바르톡의 불륜. 결혼당시 디타는 겨우 20살로 바르톡보다 무려 22살이나 연하였다!
로리 취향의 바르톡 - ↑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바르톡의 모국인 헝가리는 2차대전 당시 나치와 파시스트에게 부역했던 나라이며 공식적으로는 2차대전의 패전국이다. 다만 독일이나 이태리에 비해 국력이 시원찮았고 전쟁참여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욕을 먹지 않았을 뿐. 그가 미국으로 떠나게 된 배경에는 이런 국가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다.
- ↑ 한편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가 미국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런저런 후원으로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 ↑ 바르톡은 자신의 사후 부인과 아들의 생계를 위해 죽기 직전까지 작곡을 했다. 사망당시 그의 악보에는 비올라 협주곡 스케치와 더불어 7번 현악4중주의 스케치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 ↑ 바르톡의 초기작품 상당수는 작곡가 본인의 요구에 의해 최근까지 공개나 출판이 금지되어 있었다가 저작권 기간이 끝난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런 이유로 초기 작품들만 뒤늦게 따로 정리가 된 것이다. 한편 DD번호가 붙어 있는 곡 상당수는 악보가 소실되었으며 작곡되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 ↑ 세 개의 리스트로 되어있는데, 리스트1은 31번까지, 리스트2와 3은 각각 21번까지 붙어있다. 리스트3을 제외하고(일부를 제외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번호가 붙어있으므로) 리스트 1과 2는 모두 피아노곡이거나 실내악 작품들이다.
- ↑ 굳이 찾아보면 크리스마스 캐럴 민요를 편곡한 작품이 있는데 물론 신앙심에서 나온 작품은 절대 아니다.
- ↑ 이 작품은 모음곡으로 편곡되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부다와 페스트(다뉴브 강을 경계로 좌우로 나뉘어진 부분)의 합병 50주년
- ↑ 그의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 원래 스케치만 남아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비올리스트이자 이 곡의 의뢰자였던 티보 셸리(Tibor Serly)가 완성하여 초연을 하였다. 미완성작임에도 불구하고 협주곡 분야의 독보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바르톡의 스케치가 공개된 후 셸리판본과 이 스케치를 대조해본 결과 무려 200여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확인되었다. 셸리가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여러 부분에 손을 댔고 관혁악 수법도 바르톡의 그것과 차이가 많이 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후 넬손 들라마지오레와 폴 노이바우어와 페터 버르토크가 완성한 개정판을 연주한 버전이 있는데, 이 버전 역시 만만찮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좀더 원본에 가깝게 재구성하자는 철학으로 작성된 판본이 1992년 비올리스트 사바 에르델리(Saba Erdelyi)에 의해 완성된 에르델리판이다. 이 에르델리판은 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곡의 저작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에 아쉽게 아직 널리 연주되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음반으로 출시되거나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는 바르톡의 비올라협주곡은 대부분 셸리판으로 연주된 버전이다.
- ↑ '야만적인 알레그로'라는 뜻으로 연주시간이 3분이 채 안되는 피아노 소품이지만 바르톡 특유의 타악기적인 울림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는 이후 피아노 독주곡이나 협주곡에서 이 작품의 성과를 자주 활용하였다.
- ↑ 피아노 연습용 교본으로 바르톡이 둘째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 총 6권 153곡의 소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가 커질수록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는데 140번대 이후의 작품들은 연습용보다는 연주회용 소품으로 더 어울리는 난이도를 갖고 있다. 현재에도 각국에서 피아노 교재로 쓰이는데, 아쉽게 한국에서는 그리 많이 보급되지 않고 있다.
- ↑ 바르톡은 민속음악 선율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그 중에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원래 피아노곡이지만 작곡자에 의해 관현악용으로도 편곡됐으며 현재에도 바이올린 등 여러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 ↑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바르톡 특유의 작곡수법들이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으로 그의 음악이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palindrome형 선율배치라던가 황금분할식의 리듬, 피보나치 수열 방식의 음표 배치 등등이 이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당시에는 너무 전위적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거부당하기도 했고 초연 당시에도 이상한 음악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 ↑ 미국시절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의 요청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 ↑ 이와 비슷하게 벨기에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남겼다.
- ↑ 바르토크는 선율의 인용을 표절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셰익스피어나 페로 같은 사람들의 작품이 당대의 통속 구전들을 편집하거나 그대로 썼던 적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작품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저하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